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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동산

나는 잠시 쉬었다 간다.

by 뺑덕갱


베란다 너머로 요즘 보기 드문 선명한 노을빛이 아파트촌 구석구석을 어루만지며 다가왔다. 트레이닝 바지에 다리 한 짝을 넣다 말고 깽깽 발로 홀리듯 뛰쳐나갔다. 창을 활딱 젖히고 난간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이렇게 돌려보고 저렇게 돌려보아도 하늘을 조각낸 아파트가 눈앞에 버티고 있어, 언제나 갤러리 밖에서 기웃대는 느낌이다. 나머지 다리 한 짝을 마저 집어넣고 집을 나섰다.

투명해진 바깥바람에 가슴속까지 뻥 뚫린 느낌이 들었다. 아파트 뒷길을 따라 뒷동산을 향해 걸어갔다. 몇 걸음에 덜커덩덜커덩 돌아가던 내 안에 위태로웠던 소리가 차분하게 들려왔다. 마음이 편하니 귀도 열리고 눈도 열렸다. 보도블록 위를 서성대는 이름 모를 들풀이 나를 붙잡는다. 걸음을 멈추고 몸을 숙여 얼굴을 가까이 하니 살랑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사방 뛰기를 하듯 조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뒷동산 입구에 도착하자 산에서 번져오는 서늘한 바람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늘어선 나무들이 묵묵히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베란다 난간에 서면 뒷동산에 계절이 들락거리는 것이 보인다. 이른 봄이 오면 맨숭맨숭한 뒷동산에 노란 개나리가 먼저 깃발을 꽂았다. 죽은 듯 보이는 나무들, 미간을 찌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말라깽이 나뭇가지에 코딱지만 한 움 자리가 들썩댔다.

하루 가고 이틀 가고, 거실 거리는 덤불 더미 위에 슬그머니 하얀 꽃들이 내려앉아 살짝 쿵 나를 놀라게 했다. 엄마는 찔레 꽂이라 했다. 계단을 옮기면 층층이 진달래 무리가 산허리에 연지를 찍고 또 한 계단을 오르면 철쭉 꽃다발이 곤지를 찍었다.

여기저기 기웃대고 참견하다 보면 어느새 산머리에 오르고 내 심장은 뜀박질을 쳤다. 손바닥으로 다리를 붙들고 한참을 헐떡이다 몸을 일으켜 세우면, 툭 터진 하늘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멀리 아파트 지붕들이 들쑥날쑥 끝없이 띠를 이루며 늘어서있다. 고흐를 만난 그림 속의 풍경처럼 노을빛을 머금은 아파트촌은 꿈틀댔다. 바스락거리며 청설모 한 마리가 나무 등을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며 나를 훔쳐보다 가버렸다.

작은 능선을 따라 걸어갔다. ‘소쩍소쩍’ 들려오는 산새 소리에 고개를 쳐들고 이 나무 저 나무 위를 살피다 나도 ‘소쩍소쩍’ 대답했다. 문뜩 얼마 전의 일이 떠올랐다. 하늘 길을 잃고 아파트촌을 헤매던 까마귀 한 쌍을 베란다에 서서 한참을 지켜본 적이 있다.


“바보야~ 저기 숲으로 가라고!” 애가 탔었다.

발길에 톡톡 차이는 작은 돌멩이들도 숲에 들어앉아있으니 안심이 되고 행복해 보였다. 쌀쌀해진 저녁 산바람에 주머니 속에 손 찔러 넣고 다시 걸어온 길을 되돌아서니, 숲이 묵직해졌다. 나에게 집으로 돌아가라 한다.


다행이다. 뒷동산이 있어.

나는 잠시 쉬었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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