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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상처의 쇼윈도

두 달짜리 행복

by 제리
오래 살아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지워지지 않는 벽지의 얼룩처럼 온갖 기억들이 집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다. 가족에게 받은 고통, 내가 그들에게 주었거나, 그들로부터 들은 뼈아픈 말들은 사라지지 않고 집 구석구석에 묻어 있다. 집은 안식의 공간이(어야 하)지만 상처의 쇼윈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족 간의 뿌리 깊은 갈등을 다룬 소설들은 어김없이 그들이 오래 살아온 집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여행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김영하『여행의 이유』



신혼집을 계약하고 깨끗하고 예쁜 집에 손수 고른 가전과 가구를 하나씩 들이면서, 행복하기만 했다.
그 사람도 새 집에서 행복해 보이는 내 모습을 좋아했다.



함께 고른 그릇, 이불 같은 것들로 집이 채워지고 낯선 동네였지만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행복한 시간은 겨우 두 달 남짓이었다.


집에 일이 생겨 본가에 다녀온 어느 날
부모님과 그 사람,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 함께 밥을 먹던 자리에서 아빠가 말실수를 했다.



그 사람은 집으로 돌아와 울면서 화를 냈고, 나는 반복해서 사과했다.
그때는 나도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뿐이었기에, 아빠에게 모진 말을 많이 했다.



그 사람은 내가 보는 앞에서 아빠와 전화로 소리를 지르면서
“장인어른으로 모시지 않겠다, 어른으로 대우할 수 없다, 당신 앞으로 보지 않겠다”는 말들을 쏟아냈다.
일방적으로 끝난 통화에, 아빠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아빠의 말실수로 이런 상황이 생긴 건 미안하지만, 이런 말까지 들어야 할 정도인가?’를 생각했고,
그 생각이 그 사람에게는 반감으로 비쳤던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누가 잘했다 잘못했다기보다는 서로가 자기 입장만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사람의 입에서 이혼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왔다.
“그런 말을 듣지 않게 네가 했어야지.”
“그런 말을 들었으면, 네가 나 대신 네 아빠를 쥐 잡듯이 잡았어야지.”

터진 입에서 나온 말을, 내가 어떻게 막을 수 있었을까.
아빠가 잘했다는 건 아니다. 분명히 잘못은 했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혼’이라는 건 내 인생에서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 단어가 내 삶에 등장할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아빠를 둬서 미안하다. 부모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었고, 모욕이나 무시의 의도는 정말 없었다.”
그 어떤 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사람에겐 자신의 감정만 있었고, 우리는 없었다.

대화는 되지 않았고, 그 사람의 감정이 감당되지 않아
나는 결국 그 사람의 형제에게 상황을 알렸다.
본인의 형제와 통화를 마친 후, 그 사람은 울면서 무릎을 꿇고 “너무 미안하다, 내가 큰 실수를 했다, 용서해 달라”라고 말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아빠에게 소리 지른 것에 대해 사과하고, 아빠도 미안해하고 있으니, 사과를 받아달라.”라고 말했고


돌아온 대답은 “너에게는 미안한 게 맞지만, 네 아빠와는 다시는 말하고 싶지도 않고, 죄송한 마음도 없다.”




연애하면서 그 사람의 극단적인 성격을 몇 번 본 적 있다.
“1을 당하면 10으로 갚아야 속이 시원하다”라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게 무서워 “언제 나에게 그 잣대를 들이댈까” 두려워했고,
그는 “절대 너에게는 그러지 않을 거야”라고 했다.

그 잣대는 결국 내 아빠에게 들이대졌고
나는 그 사람의 성격을 알면서도 이 길을 선택한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거실에서 그 사람과 얘기를 나누는데 문득 떠올랐다. ‘집은 상처의 쇼윈도’라는 그 문장.

책을 읽을 때는 다른 이유로 가슴에 남았던 그 말이, 이젠 이 장면을 떠올리겠구나.

행복을 주던 신혼집은 내게 고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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