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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유재 Oct 18. 2024

TMI, TMA(Ad.), TMS(safety)?

10월 18일 출근길

  어둑어둑한 아침이다. 한동안 내리지 않던 비가 제법 내리고 있다. 예보에서는 시간당 10밀리의 비가 내린다고 알려준다. 사거리에는 아스팔트 바닥 빗물에 버스 전조등과 신호등 불빛이 반사되어 일렁거리고 있었다. 빗물에 비친 불빛은 마치 화염이 하늘로 솟구치어 오르듯이 몸통을 흔들고 있었다.


  시작은 휠체어리프트였다. 신당역에서 내려 계단을 오르는데 앞서 가는 사람이 급하게 상체를 옆으로 움직였다. 계단 끝 장애인용 휠체어리프트가 계단 난간보다 돌출되어 오르는 사람이 놀란 것이었다.

  '나도 놀랬었지…’

  계단은 세 사람이 동시에 오를 만한 넓이인데 세 사람이 오를 경우 한쪽 끝에 있는 사람은 휠체어리프트에 부딪칠 수 있었다. 

  휠체어리프트에는 주위 벽까지 포함해서 여러 가지 표지가 부착되어 있었다. 리프트 몸체에는 허용하중을 300 킬로그램으로 제한한다는 내용이, 전기패널에는 작동법과 경고표지, 주의표지가 복수로 달라붙어 있었다. 조작반에는 엉뚱하게도 '사용금지' 표지가 붙여져 있었다. 조작할 때 계단 시작지점에 있게 되는 그런 상황은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사용을 금지하고 있는 듯했다. 표지에는 직원 호출 버튼이 1 미터 뒤쪽에 있다는 문구도 있었다. 친절하게도 그 표지 위쪽에는 직원 호출버튼이 불편하면 고객상담실로 전화해 달라는 또 다른 표지가 붙어 있었다. 

  ‘사용금지…, 직원 호출하기 위해 후퇴…, 고객상담실에 전화…’

  어떻게 이용할까 하는 시선으로 따라가 보니 현실과의 괴리감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이걸 쓰는 걸 딱 한번 봤지…’

  지하철 직원이 조작버튼을 눌러 휠체어리프트를 펼치고 있었고, 장애인은, 내 시야에서 숨겨져 있었다. 내가 시선을 돌렸던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에겐 분명 필수일 텐데…’


  평소에는 보이지 않지만 필수인 것들 또는 그렇지 않은 것들, 지하철은 그런 것들로 가득하다. 계단을 올라 걸어가니 먼저 구호물품함이 보였다. 구호물품함 안에 가지런하게 정열 되어 있는 두툼한 은박 봉투들이 보였다. 다음으로 '펀시티 서울'을 알리는 광고판이 큼직하게 벽에 붙어 있었다. 벽에는 휴대용 비상조명등함이 있고 역사 내 무질서 행위를 단속하겠다고 알려주는 알림판도 부착되어 있었다. 또 다른 계단이 나타나서 계단을 올라서면 휠체어리프트가 있고, 그다음 벽체에 '정동야행'을 알려주는 광고와 또 휴대용 비상조명등함이 있고, 그 뒤로 뮤지컬배우 정선아의 생일을 축하하는 광고용 전광판이 커다랗게 붙었다. 이어서 '서울청년문화패스' 광고판이 여러 개 반복되어 붙었고, 다시 휴대용 비상조명등함, 계속되는 소화전함과 소화기함.

  이번에는 꽤 긴 환승통로를 얼마만큼 지나가고 있는지 알려주는 표지도 있었다. 표지에는 앞뒤를 향한 화살표가 있고 뒤를 향한 화살표에는 300 미터, 앞을 향한 화살표에는 210 미터라고 쓰여 있었다.

  '300 미터를 왔고 앞으로 210 미터를 더 가야 하는군! 멀다…’

  표지는 친절하게도 세 군데에 나누어서 설치되어 있었다.

  좀 더 걸어가니 '이동상인 불법 판매 금지' 표지와 '무빙워크 운행시간' 알림판이 이어졌다. 얼마 전까지 한 아주머니가 바닥에 주저앉아 푸성귀를 팔았던 그 자리에는 '이동상인 불법 판매 금지' 표지가 붙었다. 출력물에 코팅을 한 임시 표지판이었다. '무빙워크 운행시간' 알림판도 코팅을 한 임시 표지였다. 표지는 투명테이프로 붙였는데 깔끔하게 붙지 못하고 여기저기 주름이 지어져 있었다. 서비스를 제고하려는 복수의 노력이 TMI를 돋우었을 것이다.


  무빙워크 끝까지 오니 갈림길이 나타났다. 오른쪽은 성수행, 왼쪽은 시청행. 이곳 환승통로에서 가장 중요한 이정표인데 아무도 시선을 주지 않는다. 계단을 내려오니 승강장 입구에 '승차는 게임이 아닙니다' 주의 표지가 붙어 있었다. 뛰어가는 남자와 경고 문구가 적힌 표지는 박스를 포장할 때나 쓰는 회색 테이프로 덧붙여 있었다.

  '뭐, 제 때 전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좋게 생각하고 싶었다.

  8-3번 출입구 자리로 갔다. 스크린도어에는 '발 빠짐 주의, 열차와 승강장 사이가 넓습니다'라는 시트지가 붙어 있었고 그 옆의 투명한 유리창에는 시 한 편이 새겨져 있었다. 2021년 시민공모작으로 당선된 김형식의 시였다.


  수박 웃음


  나는 당신의 웃음이 좋아요

  반으로 쪼개진 수박처럼 해맑은 웃음


  수박이 커다란 이유는

  웃음을 나눠주고 싶었기 때문이래요


  하나의 수박에서 쪼개진

  수많은 웃음들이 보여요


  쩍!

  반가운 웃음소리가 들려요


  반대편 벽체에는 '지하철 화재 시 행동요령'과 임산부를 배려하자는 '비워두고 배려하고 양보해요' 표지가 있고 바닥 구석에는 대형소화기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열차 안에도 정보는 넘쳤다. 객실 통로 천정에는 안내 전광판이 2개가 설치되어 공익광고를 보여주었다. '화재 시 마스크 착용 요령', '임산부 식별요령', '지하철 안전한 이용법', '지하철 에티켓', 'SOS 비상전화 이용법', '자동심장충격기 사용법' 등등. 출입구 상부에는 좌우로 나누어진 전광판 한쪽에 지하철 노선도가 표시되어 도착 예정역이 깜박깜박거렸고 다른 쪽 전광판은 광고를 보여주며 번쩍거렸다. 전광판은 쉼 없이 계속해서 광고를 쏟아내고 있었다.


  한참 살펴보고 있는데,

  "... 이 열차의 종착역인 성수역입니다."

  안내방송이 나왔다. 육성이 다시 한번 나왔다.

  "이 열차의 종착역인 성수역입니다. 성수역입니다. 모두 내리시기…"

  사람들은 당황하지는 않았지만 의뭉스러운 표정이 다수였다. 열차에서 내렸다. 한번 더 육성이 터져 나왔고 열차의 조명이 꺼졌다. 성수역까지만 가는 열차라고 안내방송이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어쨌든 이 많은 정보 중에 내가 듣고자 한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다음 열차는 붐빌 수밖에 없었다. 몇 정거장을 갔을 때에는 승강장에서 열차를 타지 못하고 난처해하는 얼굴들까지 보게 되었다.

  기왕에 하던 관찰을 계속했다. 열차의 출입구 좌측 문 상단에는 '전동차 내 비상시 행동요령'이 차량번호와 전화번호를 포함하여 붙어 있었다. 오른쪽 벽에는 조작방법을 안내하고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출입문 비상개폐 손잡이함이 설치되었고 함부로 만지면 징역을 살 수 있다는 경고도 빼놓지 않았다.


  잠실역에서 하차했다. 계단으로 걸어가는 걸음이 밀렸다. 계단 앞은 우글우글 사람들로 붐볐다. 계단 폭의 오 분의 사는 내려오려는 사람들이었고 오르는 사람은 한두 줄 정도로 줄지어 간신히 올라가고 있었다.

  '언제 빠져나가나…?'

  빠져나가는 시간의 지체는 불안을 일으킨다. 계단까지, 그리고 계단을 모두 올라가기까지 시간이 지체되었다. 마스크며 조명등이며 아무리 안전시설이 많아도 이곳에서 나가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일 까. 

  계단 초입 오른쪽 구석 천정에 반사경이 달려있었다. 계단 맨 위에도 달려있었다.

  '이건 무슨 용도지? 도대체 뭔 감?'

  도대체 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반사경 속에는 내 주변의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이 보일 뿐이었다. 개찰구를 나오니 전면 천정에 좌우로 '나가는 곳' 안내판이 있고, 가운데 기둥에는 장소와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가 커다랗게 붙어 있었다.  지상으로 나가는 통로에는 5 ×4열의 물품보관함이 4개나 설치되어 있었다. 물품보관함에도 보관함 번호며 QR코드며 설명서며…, 그만… 그만…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그만… 그만.’

  물품보관함 사이에는 ATM기기 같은 환전기까지 있었다. 이제 그만. 

  그제야 반사경의 용도가 생각났다.

  '아! 불법촬영…, 애쓰네.'

  지하철을 운영하는 이들의 애씀과 그에 대한 감탄이 가슴으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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