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2일 출근길
가을이다.
지난주는 최저기온이 5도씨 내외로 떨어져 서늘함을 일으키더니 요 며칠 최저기온은 10도씨, 최고기온은 20도씨 안쪽으로 청명한 가을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가을은 시각과 청각과 촉각을 거쳐 마음속에까지 왔다.
사거리 코너마다 차도와 인도 사이에는 볼라드가 설치돼 있다. 허리 높이 원통형의 볼라드는 위가 평평했다. 지나가며 보니 볼라드 위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비가 오지 않았는데…'
이슬이다. 풀잎에 보석 같이 달려있어야 할 이슬이 도시에서는 이런 곳에 힘을 잃고 퍼져 있었다. 궁금해서 철쭉 이파리를 만져 보았다. 손끝에 미끈한 물기가 만져졌다. 땅에 가까운 잔디나 철쭉이나 화살나무나 키 작은 나뭇잎들이 이슬을 머금고 있을 것이다. 도시의 소음에 들리지 않지만 풀벌레들도 그 속에서 울고 있을 것이다.
마을 공원이 가을빛으로 물들었다. 느티나무가 가장 붉게 물들었다. 짙붉은 잎들은 핏빛에 가까웠다. 대왕참나무는 밝게 붉었다. 표창처럼 삐죽한 잎사귀들은 투명한 붉음이었다. 벚나무들은 붉고 탁했다. 메타세쿼이아는 누르스름했고, 무릎높이 철쭉들도 검붉은 빛으로 변했다. 어제도 단풍을 알리는 뉴스를 보았는데 이곳에도 단풍이 찾아왔다.
마을 공원의 나무들이나 가로수 밖에 도시의 가을빛을 느낄 수는 없는 건가?
'가을 빛깔을 찾고 싶다…'
버스를 타며 둘러보았고 버스에서 내려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돌곶이역 개찰구를 지나 계단을 내려오며 빛깔을 하나 봤다. 계단 시작부터 아래 끝까지 여덟 명의 남녀가 듬성듬성 내려가고 있었는데, 모두 검다. 옷감이 윤이 나거나 바랬거나 바지를 청바지를 입었거나 운동화를 신었거나 하는 차이일 뿐 모두 검었다. 검은색 상하의에 아이보리색 패딩 조끼를 걸친 게 그나마 유일한 다른 색깔이었다.
'도시의 가을빛은 검은색인가!'
아쉽다. 계절은 바뀌는데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좀 서글프지 않은가. 그 느낌이 검정이라면 아쉽지 않은가.
열차 속 승객들도 모두 검었다. 검은색이 맞는 것 같다, 가을빛은. 줄의자에 앉은 사람들, 내 좌우로 서있는 사람들 모두 검은빛이었었다.
가을빛을 찾는 내 눈은 약간 간절해졌다. 오른쪽으로 출입구 옆에 등지고 기대 서있는 여자가 보였다. 옅은 카키색 바탕의 체크무늬 재킷을 입고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에메랄드 블루 빛깔 치마가 약간 보였다. 숱이 많고 굵게 내려온 머리칼까지 더해져 가을 느낌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걸 갖고 무슨 가을 감성…'
지하철에서 가을 감성 찾기는 무리수일 까.
열차는 소음을 내며 정거장을 지나갔다. 열차의 소음을 빼곤 정적이 흘렀다. 오른쪽 좀 떨어진 곳에서 기침소리가 났다.
"어취!"
사람들에 가려져 둔탁했지만 강하고 거센 기침이었다. 잠시 후 이번에는 왼쪽 가까이에서 숨을 죽인 기침소리가 났다.
"윽치!"
기침은 전염되었다. 한쪽에서 '큼!' 소리가 나고 이어서 다른 쪽에서 '킂!' 소리가 나더니 '크읍!', 기침 소리가 연이어 일어났다. 기침 소리는 도시의 가을 소리다. 부자연스럽게 억눌린 기침 소리는 지하철 속에서 가을을 알려주고 있었다. 계절을 못 느끼는 것보다는 나은 것인 가.
신당역에 도착했다. 내리려고 돌아서는데 바로 뒤에 서로 손을 잡고 서있는 부부가 보였다. 남자는 신당역에서 내리는지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아쉬운 손 놓임. 여자는 아이보리색 코트에 밝은 베이지색 바지를 입었다. 남자는 회색 셔츠 위에 고동색 코르덴 조끼를 입었다. 짙은 파란색 면바지를 입고 검은색 어깨가방을 메었다.
'고동색의… 코르덴… 그것도 조끼!'
이 정도는 돼야 가을 빛깔이다. 가을 감성이다.
환승통로를 거의 지나갈 무렵 또 한 남자가 보였다. 베이지색 트렌치코트에 통이 넓은 검은색 바지. 검은색 가죽 등가방은 크기가 적당하고 각이 없이 자연스러웠다. 목 주변으로 니트칼라의 굵은 주름이 보였다. 거기에 더해 흰 머리칼이 듬성듬성 보여 가을 감성이 물씬 풍겨 났다. 아쉬움이 하나 있다면 군청색 운동화를 신은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