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의 소식을 듣기 1년 6개월 전, 소방관인 남편은 119 구조대 소속이었다. 그는 그 일을 좋아했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좋다며 비번 날에도 함께 자주 어울려 다녔다. 그 일이 있기 전 결혼을 한 달 앞두고 있던 남편의 동료 구조대원은 웨딩촬영차 하루 휴가를 냈다. 24시간 근무 24시간 비번인 2교대의 열악한 근무환경과 절대적 인력부족에 시달리던 2008년도의 소방관들. 그 상황에 피치 못할 개인적 사정으로 휴가를 다녀온 뒤 복귀한 예비 새신랑 구조대원은 불어난 물에 사람들이 고립되어 있다는 연락을 받고 출동했고 그 구조현장에 막 투입되려는 남편에게“내가 들어갈게”라며 남편 차례를 대신하여 기꺼이 들어간 물에 휩쓸려 세상을 떠났다.
동료를 잃고 우는 남편에게 “그게 당신이 아니라 너무 다행이야”라는 말이 제일 처음 나온 나도, 내일은 정말 내 남편의 일이 될 수도 있는 그의 직업도 싫어졌다. 아. 그랬지. 생사를 걱정해야 하는 직업. 그게 싫어서 나는 관둔, 그러나 남편은 천직이라 여기고 있는 저 일. 소방관이었지. 2년을 남편과 동고동락했던, 모테솔로였던 그가 드디어 짝을 만나 결혼을 한 달 앞두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런 동료의 죽음에 그래도 결혼 전이니 다행이고 두 살 난 딸과 아내가 있는 남편이 그 물에 들어간 게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말로 산사람을 위로해야 하는 직업. 죽음이 늘 곁에 있어서 상황적으로 지금 죽는 게 나중에 죽는 것보다 나은 거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예비신부에게 하게 하는 미친 그 직업이 죽도록 싫었다.
그때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 일이 나의 남편의 일이었더라면. 두 쪽 다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중 어느 쪽 하나였더라도 분명한 건 지금의 나의 삶은 많이 달랐을 거라는 것 밖에는. 삶은 언제 나를 덮칠지 모르는 파도로 갑자기 완전히 전복되기도 한다는 걸, 그 파도가 나를 덮치기 전에 아무리 예쁜 척을 하고 예쁜 옷을 입고 바닷가에서 사진을 찍고 있어도 파도 한방으로 온몸에 짠 바닷물을 뒤덮고 남은 인생을 살 수도 있다는 걸 무기력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이, 내가 계획한 대로의 하루하루를 사는 것 같지만 아주 작은 것들도 내 마음대로 되는 건 별로 없다. 아침을 안 먹는 내가 오늘 아침 아이가 배가 아프다며 우유에 말아놓은 시리얼을 그대로 남기고 학교에 갔을 때 버리기가 아까워서 꾸역꾸역 먹고 그대로 체해서 오전에 하기로 했던 운동을 못하고 내내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것부터. 사건의 연속이다. 내 삶에 아주 어울리는 그 말. 사건의 연속.
“놀려고 별 짓을 다하네, 차라리 피해 주지 말고 관둬”
남편도 나도 휴식, 아니 힐링이 필요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동료를 잃은 소방관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프로그램 따위는 활성화되지 않았었고 감정의 동요가 크게 없는 남편도 그 시간들을 너무 견디기 어려워했다. 멘탈 관리 차원에서 구조대 팀은 해체됐고 남편은 일근직으로 발령이 났다. 몸으로 일하는 게 맞는 남편은 소방 관련 사무를 봐야 하는 맞지 않는 그 일을 힘들어하고 있던 그 해 겨울, 마침 내 주위에 한 둘씩 이민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고 어떻게 하면 일하다가 죽을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을까가 중요해진 나는 한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다른 일 하면서 살면 더 행복할 것만 같았다.
이민자에 비교적 너그러운 캐나다가 적격이었다. 한국사회의 치열한 경쟁에 얻어맞지 않아도 되니 아이한테도 얼마나 좋니. 이 한국이라는 곳은 아이를 키우기엔 적합하지 않아. 자유롭고 편견 없이 이민자를 대하는 그곳은 아름답겠지!라고 남편을 설득했다. 내가 내리는 모든 결정을 언제나 지지하는 남편은 이번에도 오케이. 하지만 당장 사직서를 내기엔 졸리긴 나도 마찬가지. 그래, 직업을 관두지는 말고 일단 가서 살아보고 살만하면 이민!이라고 결론을 냈고 전무했던 남자 소방공무원 육아휴직을 처음으로 달성하는, 소방관 역사에 획을 긋는 일을 시도했다. 휴직을 실행시키는 일이 그토록 길고, 험란하고, 모욕적인 시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영유아를 키우는 공무원 부모는 아이의 양육을 위해 휴직할 수 있다는 좋은 제도는 15년 전만 해도 그 어떤 남자 소방관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이름뿐인 제도였다. 끈질기게 남편을 설득하며 몰아붙인 내가 아니었으면 소방관 세계에서 육아휴직은 언제쯤 당연한 제도가 되었을까. 쉽지 않았으리라. 남편은 15개월 아이의 부모로서 육아 휴직서를 제출하면서 상사에게 무시무시한 쌍욕과 함께 휴직사유(육아휴직임을 이미 밝혔음에도)와 외국에서 보내게 될 시간에 대한 계획서 및 공인된 학습기관에서 인정한 확인서를 요구받았다. 주민등록등본에 증명된 아이의 아빠라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서류도 필요 없었음에도 직속 상사에게 “놀려고 별 짓을 다하네, 차라리 피해 주지 말고 관둬”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고 심지어 그는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 이미 등록해놓은 영어학원 등록서류를 제출하자 서류를 집어던져버렸다.
어쩌라는 거야. 지금 같으면 갑질 오브 더 갑질의 표본으로 아주 그냥 인터넷에 올려서 허리 90도로 꺾고 백배사죄하는 영상 찍어 영구 소장해서 열받을 때마다 돌려 볼 텐데. 아무튼 남편은 그런 핍박에도 불구하고 육아휴직이라는 쾌거를 달성한 선구자였다. 그 뒤로 소방관들은 하나둘씩 육아 휴직서를 제출하기 시작했다. 용기를 내어 휴직을 누린 자들은 남편의 수모를 기억하기를.
그리고 미안.
그렇게 도착한 5월의 캐나다는 너무 아름다웠다. 우리가 머문 밴쿠버는 작은 항구도시였고 그곳의 사람들은 여기 우리나라의 사람들처럼 바쁘지 않았고 늘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해주는 선진시민으로 구성된 선진국가였다. 난 작고 영어도 서툰 낯선 동양인을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그들의 국민성의 비밀이 지금도 궁금하다. 그것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던 이유는 아마도 우리나라에 온 약소국의 국민을 그들처럼 따뜻하게 대하지 못하는 나와는 너무 다르기 때문이리라. 더우면 덥다고, 추우면 춥다고 안녕하냐고 언제나 먼저 말 걸어주던 대부분의 그들이 아직도 고맙다.
하지만 매일매일 청명한 날씨, 너무 차갑던 바람과 너무 뜨거운 햇살이 공존하는 환상의 나라 캐나다에서 내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일은 그저 나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는 그들의 국민성에 감동한 것과는 별개였다. 내가 돈을 벌기 위해 캐나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잠깐 공부를 하러 온 한국 아이들을 대상으로 수학 과외를 해 볼까 했으나 모집되지 않았고 불을 매우 잘 끄는 우리 남편 역시 낯선 그곳에서는 그의 재능을 펼칠 수 없었다.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인 식당에서 설거지하기, 마트에서 계산하기는 엄마와 언니가 없는 외로움을 견디며 캐나다에서 살게 하기엔 매력적인 직업이 아니었다. 그곳으로 출발하기 전에 내가 갖고 있던 기대와 환상들은 내 능력의 한계에 부딪히며 눈앞에 현실로 인해 이미 나와는 유리된 ‘그들’의 삶일 뿐이었다.
왜 미리 충분히 고려해보지 않았을까. 캐나다에서 먹고살 길을 열심히 찾지 않고 그냥 떠난 이유는 아마도 한국엔 내가 그토록 싫어하지만 철밥통인 남편 직업이 보험으로 남아있어서, 그리고 나는 일단 한국을 떠나는 것이 더 중요했어서였으리라. 모든 일에 심사숙고하는 법이 없는 나는 닥치고 난 뒤 아닌 걸 알면 다시 돌아 나오는 게 계획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편 보다 편했다. 딱 보니 각이 안 나왔고 또한 더 나은 환경에서 내 아이를 키우겠다 다짐했던 내 모정은 그렇게 희생적이진 않았던 걸 수도. 수많은 이민자들은 감수한 외국인 노동자의 삶을 나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딸, 내가 행복해야지 너도 행복한 거란다. 그리고 미안.
천사 같은 아이들과 내가 만드는 교실
그렇다면 나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난 이제 뭐하고 살지. 이건 진정 중대하고 심각한 고민일 수밖에 없다. 사실 나는 다니던 대학을 두 번이나 관두어 고졸에 머물러있고 갑작스러운 친구의 권유에 도전하게 된 소방공무원에 덜컥 합격하여 그렇게 1년 반을 살다가 내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은 뼈저리게 절감하고 사직했다. 그 뒤 신혼집의 방 하나를 시작으로 공부방을 차렸고 학생이 늘고 번창하자 학원까지 차리고는 어느 순간 그 학원에 심드렁해 있던 차에 남편회사의 사고가 빌미가 되어 다 그만두고 캐나다로 떠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이는 진정 커다란 고민이었다. 나 이제 어떡하지. 전업주부? 그런 상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다. 평생 일만 하고 사시는 엄마 덕인지 당연히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 번개처럼 스친 것이 바로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라 하면 꿈의 여자 직장으로서 결혼정보업체에서도 높게 쳐준다는 그 직업? 내가 어릴 때부터 갖고 싶던, 그러나 달성할 수 없던 그 직업에 대한 열망으로 학원이며 공부방이며 가르치는 일에 서성이게 했던 바로 그 직업? 천사 같은 아이들과 내가 만드는 교실, 그리고 존경과 약간의 사회적 우대까지 받을 수 있다는 그 꿀 직업 말이다. 그럼 교대를 다시 들어가야 하는데..라고 생각한 다음날 한국으로 돌아가는 티켓을 끊었다. 캐나다에 한번 살아보자. 그리고 이민!이라고 외치던 그날의 부푼 꿈은 간데없고 오히려 이곳이 캐나다인 것이 시간의 낭비라 여겨져 버렸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1주일 전, 한국행 비행기를 티켓팅 한 다음날, 캐나다에서 바로 수능 공부를 시작했다. 7월이었으니 나에게 남은 기간은 4개월 남짓. 역시나 심사숙고하지 않는 나는 막연한 기대와 가능성으로 닥치는 대로 공부를 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수학 문제를 풀었다. 한국에 돌아와서의 4개월은 말 그대로 전투였다. 딸은 고맙게도 알아서 잘 커줬다. 아침 10시에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4시쯤 엄마가 아이를 찾아서 데리고 있으면 나는 저녁 여섯 시까지 공부를 하고 친정엄마에게 가서 아이를 데리고 오고 10시에 재운 다음 다시 12시까지 마무리. 자고 있는 중에도 수학 문제를 풀었고 꿈속에서 내가 푼 문제와 답을 아침에 확인하면서 하루하루가 갔다. 갑자기 돌아온 탓에 살 집도 없어 언니 집에 방 한 칸 얻어 세 가족 더부살이에 4개월 몰아치기. 그리고 수능 날이 왔다.
“선생님, 그런데 지금이 정확히 몇 시 몇 분 몇 초 인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벌써 네 번째 수능. 정성스레 언니가 싸준 도시락을 싸들고 교실로 들어서니 내 자리는 첫 번째 줄에 가장 앞자리. 자리 한번 좋네. 교복을 입고 삼삼오오 모여서 떠드는 고3들과 약간의 재수생들, 그리고 나. 누가 봐도 왕고였다. 어제 집에서 입고 있었던 츄리닝에 가방에는 도시락 하나, 컴퓨터 사인펜과 샤프가 내 짐의 전부였다. N수생이라면 본래 짐이 가벼워야 하는 법. 당 충전을 위한 초콜릿도, 따뜻한 꿀차도 거추장스럽고 무겁다. 하긴. 두 번째 수능 때까지만 해도 목도리에 방석에 담요에 후배들의 응원 편지, 나만의 행운의 아이템들까지 챙겨 들어갔었지. 잡스러운 것에 집중해서 모두 그 모양이었나. 1교시 감독을 하러 들어오신 선생님도 내 또래였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물어봤다.
“선생님, 그런데 지금이 정확히 몇 시 몇 분 몇 초 인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왕고 큰언니의 물음에 순간 정적이 흘렀고 몇 초인지 까지 알 수 없었던 감독 선생님은 당황했다. 그렇지만 나에겐 중요한 문제인걸 어쩌나. 지금이 몇 초 인지까지 알아야 답안지 작성과 집에 가서 채점할 수 있도록 수험표에 답 옮겨 적는 것까지 시간 내 완성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울 수 있을 텐데. 아쉽다. 그때 1교시 시작종이 치면서 몇 초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자연스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