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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월 Jun 08. 2019

퇴직 준비1

내 생각과 시간의 주인으로 살기

얼마 전 지인이 퇴직 후의 삶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물어왔다. 난 신입으로 입사해 27년 이상 한 직장에 있었다. 퇴직 후 잠시 휴식기를 가진 후 지금은 다른 곳으로 전직을 하였지만 아마도 지인들이 보기엔 내 위치가 이미 인생에서 1막 2장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하긴 오랫동안 다니던 회사를 나와 한 2년 정도 전환기를 가져보니 충격도 컸고 느끼는 바도 많았다.

그중 하나가 기존에 직장에서 맺었던 인간관계의 단절이었다. 현직에 있을 때 내 핸드폰 연락처에는 늘 1,000명 가까운 지인들 전화번호가 등록되어 있었다. 학교 동창부터 직장 동료, 거래처의 사람들까지. 직장에 있을 때는 이들 명단만 보고 있어도 든든했다. 은퇴 후에도 적어도 인간관계에서 만은 외롭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퇴직을 하니 그 많던 직장 동료와 거래처 사람 중에 마음 편히 연락할 만한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몇몇 동료야 한두 번 인사로 만나긴 했지만 늘 일 없이 어울리며 지내기엔 금방 한계가 있었다. 우선 바쁘게 일하고 있는 남은 동료들에게 연락하기가 마음 편치 않았다. 왠지 위로받고 신세 지는 느낌이 마치 짐이 되는 것 같아 견디기 어려웠다. 그런 감정은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주변 퇴직자들도 다들 비슷한 심정이었다. 


당시 어느 지인이 했던 말이 있다. 책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했다. 불치병으로 임종을 앞둔 모리 교수가 아끼는 제자 미치에게 했던 말이다. " 어떻게 죽어야 좋을지 배우게.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배우게 되니까"  젊은 시절에는 크게 느낌이 없던 이야기인데 자신이 퇴직해 돌아보니 참으로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고 한다. 퇴직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직장 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절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퇴직 후 상실감을 이겨내고 홀로서기를 한다는 것은 대단한 정신력을 요구다. 대부분 사람들은 뭐라도 소속감을 얻고 싶어서 열심히 종교 단체 동창 모임을 찾아다닌다.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직장을 떠난 이후의 대부분의 만남은 퇴직자에게 최소한 둘 중 하나를 요구한다. 시간과 돈이다.
많은 직장인들은 퇴직을 하면 알게 모르게 사기를 당한다. 퇴직 후 새로 만나는 상대방들은 경제적, 정신적으로 불안해하는 퇴직자의 절박한 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기라 하여 불법적인 보이스피싱 같은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거래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퇴직자의 귀한 재산을 갈취해가는 거래를 말한다.


내가 퇴직 당시 주변 퇴직자들의 대표적인 피해 사례는 터무니없는 가격에 분양된 신도시 상가들이다. 당시 동탄이나 위례 신도시의 상가 가격은 1층 상가인 경우 분양 면적 기준으로 평당 거의 3~4천만 원을 넘었다. 20평짜리 상가가 보통 7~8억 이상에 분양되었다. 전용 기준으로는 10평이 조금 넘는 크기였다. 당시 그런 상가 분양에 절대적인 수요를 만들어 주었던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은퇴를 시작한 베이비 부머 세대였다. 어느 정도 안정된 수입을 절실히 원했던 퇴직자들은 본인 퇴직금에 융자까지 끌어 줄을 서서 분양받았다. 이들은 대부분 상가당 최소 월 400만 원 이상의 임대료를 기대하며 안정된 노후를 기대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미 6~7년 이상 지났지만 지금 가보면 상당수가 기대했던 임대료에서 반값도 못 미치거나 임차인을 못 구해 빈 채로 남아 있다. 그런 곳에 퇴직금을 모두 쏟아부은 퇴직자들 상당수가 깊은 마음의 상처와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주변인들이 퇴직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꼭 돈만은 아니다. 다른 지능적인 사람들은 퇴직자의 시간을 노린다.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농담처럼 말한다. 그만큼 퇴직을 하고 나면 퇴직자에게 무료 노동 봉사를 부탁하는 주변 사람들이 많다. 아파트 주민회부터 각종 종교단체, 거기에 지인들과의 각종 모임까지 모두가 호시탐탐 퇴직자의 여유 시간을 노린다.

50대 후반에 퇴직했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 남아있는 건강 수명은 얼추 15년 정도다. 어떤 면에서 퇴직자에게 있어 시간은 돈보다도 더 소중한 자산이다. 그런 귀한 자산을 많은 이들이 미처 의식하지 못한 채 빼앗기도 있다.  종교나 사회단체에서의 무료 봉사야 본인들은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니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대부분 퇴직자들은 자신에게 남아 있는 여유 시간의 참된 가치를 잘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마치 세상 물정에 어두운 시골 사람이 약삭빠른 도시 상인의 감언이설에 속아 조상 대대 내려온 귀한 골동품을 헐값에 넘기는 모습과 비슷하다. 요즘 종종 뉴스를 장식하는 일부 종교인들의 엄청난 재산 축적은 다 이런 50~60대 퇴직자들의 무료 봉사 시간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종교를 빌미로 은퇴자들의 선의를 모아 개인 사욕을 채우는 불량한 종교인들이 너무나 많다.     


이런 일이 손쉽게 가능한 것은 왜일까? 대부분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며 살아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에는 학교 교과 시간에 맞추어, 사회인이 되어서는 늘 상사나 회사가 요구하는 업무 일정에 맞추어 살아왔다. 그러다 갑자기 퇴직을 하고 나서 생긴 자신만의 시간을 버거워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흔하다. 그런 이들에게는 단지 어딘가에 소속감을 만들어주고 명분 있는 일감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 인사를 받는다. 이런 심리를 이용해 종교인의 사적 이익을 위해 퇴직자들에게서 무상 노동을 갈취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기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주도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 늘 감정에 휘둘리고, 관습에 휘둘리고,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며 산다. 그래서 퇴직하여 자유인이 되려는 사람들에게 난 종종 중국 선불교의 큰 스승인 임제 선사의 말을 전하곤 한다.  '어디 가서 든 그곳의 주인이 돼라'는 '수처작주(隨處作主)'다. 임제선사가 말한 수처작주는 어디라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생각과 감정이 나를 지배하도록 하지 말고, 내가 생각과 감정의 주인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퇴직 전부터 미리미리 훈련을 해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퇴직 후 교회든 절이든 세상 어딜 가봐도 소용없다. 타인이 주입한 허무맹랑한 믿음과 생각에 치여 평생 노예적인 일상을 벗어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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