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_이탈리아인들의 건강 장수 비결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양념의 불편한 진실..!
이탈리아에서 요리 유학을 하는 동안 나를 즈윽이 놀라게 한 게 있었다. 늦깎이로 요리를 배운 탓도 있겠지만 요리에 쓰이는 양념이 그토록 많은지 미처 몰랐던 것. 학교가 위치한 꼴로르노에서 파르마 시내로 외출 일정을 잡은 이유 중에 하나는 그곳에서 이탈리아 음식문화를 체험하기 위함도 포함됐다. 파르마 역에 도착하면 시내로 들어가는 입구에 주말 장이 열리고 있었는데 그곳에 오만가지(엄청난) 양념이 전시되어 있었다. 천천히 살펴보니 몇 가지 종류 외에는 생전 듣보잡이었던 것. 양념은 음식의 맛을 돋우기 위해 사용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나 도대 저토록 많은 향신료 등은 어디에 쓰인단 말인가..
#후추에 매료된 지구별 사람들
음식의 맛을 살려주는 향신료의 역사는 오래됐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향신료에 고추와 마늘 등 몇 가지가 있듯이 세계의 각 나라는 각기 다른 향신료가 있었다. 특히 대항해 시대 때는 향신료 때문에 지구별의 역사가 새로 쓰이는 일도 생겨나기도 했다. 후추 때문이었다. 요즘은 세상 사람들 모두 사용하는 향신료가 후추였지만 당시만 해도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것. 향신료가 귀족들의 부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다.
사정이 이러했으므로 향신료를 찾아 목숨을 건 대항해가 시작된 것. 우리가 잘 아는 이탈리아 제노아 출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ristoforo Colombo)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이들의 목숨을 건 항해는 후추(Il pepe) 때문이었다. 당시 유럽에 공급되던 후추는 인도에서 들여온 것이었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서 지중해로 수입되는 물품의 절반 이상이 향신료였던 것. 콜럼버스는 인도를 찾아 떠났다가 전혀 엉뚱한 곳 카리브해에 도착하기도 했다. 그곳은 나중에 서인도제도로 불렸다.
후추의 원산지는 남부 인도의 서해안 지방 말라바르(Malabar)로 알려져 있다. 검은 후추와 흰 후추는 고대로부터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널리 쓰였으며, 근래에 녹색 후추와 붉은 후추가 개발되었다. 인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버마 등의 후추 재배 역사는 2,000년이 넘고, 20세기에 와서 소비량이 늘면서 태국, 베트남, 중국, 스리랑카, 브라질 등지로 넓혀지면서 전 세계 후추 생산량이 급증했다고 한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아직까지 후추의 주요 생산국으로 인도가 1위, 인도네시아가 2위로 꼽히는데, 이 두 나라의 후추 생산량이 전 세계 생산량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후추가 이렇듯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이랄까. 후추 상인들은 후추를 원산지별로 등급을 구분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등급으로는 인도의 말라바르(Malabar)와 텔리체리(Tellicherry), 말레이시아의 사라왁(Sarawak), 인도네시아의 람퐁(Lampong)이 꼽힌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왜 후추에 열광했을까.
후추는 고기의 부패를 방지하고 육식을 주로 하는 민족에게 필수 불가결한 조미료였다고 한다. 또 후추는 향신료로 음식에 쓰일 뿐만 아니라 약으로도 많이 쓰였다. 한방에서는 후추의 따뜻한 성질이 추위를 없애주고, 풍을 제거하며, 진통에 좋고, 비위를 튼튼하게 해 주고, 소화를 도우며, 식욕을 촉진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오장을 편안하게 하고, 신장과 혈기를 보강시켜주는 신경 흥분제로도 쓰인다는 것. 콜럼버스가 목숨을 걸고 대항해에 나선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랄까.
#요리를 먹나 양념을 먹나
이탈리아 요리 유학을 통해 배운 후추의 쓰임새 때문에 후추에 얽힌 이야기를 잠시 둘러봤다. 이탈리아인들 혹은 이탈리아 요리에 있어서 후추는 그야말로 필수 불가결한 향신료였다. 거의 모든 음식에 후추가 들어가는 것은 물론 후추 하나만 있으면 요리 준비는 끝이나 다름없었다. 이탈리아 요리에서 주로 사용되는 양념은 후추와 올리브유 그리고 소금이 거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요리학교에서 가르치는 이탈리아 요리는 요리의 주재료 맛을 200% 살려내는 일이었다. 양념은 주재료 맛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용돼야 했던 것. 여타 향신료의 사용도 이 같은 범위 내애서 사용해야 했다. 따라서 주재료 맛을 흩트리거나 빼앗는 양념 혹은 요리법은 이탈리아 요리가 아니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한 일화를 소개한다. 꼴로르노에서 일어난 실화이다. 한 학생이 와인 잔을 앞에 두고 프랑스 요리의 양념(Salsa)을 극찬하면서 이탈리아 요리의 양념을 비하한 일이었다. 그는 프랑스 요리의 양념 맛에 길들여진 탓인지 담백한 양념 일색(?)인 이탈리아 요리가 '프랑스 요리에 비교도 안된다'라고 말했다가 역공을 당했다.
"허허 이 친구야 요리를 먹나 양념을 먹나..!!"
그는 꼼짝없이 자기가 한 말에 당하고 말았다. 요리는 양념을 먹는 게 아니라 주재료에 양념을 더한 것. 예를 드나 마나 생선 요리는 생선 비린내만 제거하면 될 것이며, 거기에 생선 맛을 드높이는 향신료가 필요할 것이다. 역공을 한 친구는 한국의 그릇된 음식 풍토에 대해서도 한마디 덧붙였다.
한국의 어느 맛집에 등장하는 삼겹살 구이 등 양념을 범벅한 음식에 대해 비판에 나섰다. 온갖 한약재를 섞어 만들었다는 양념은 주재료 본연의 맛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양념 맛만 도드라지는 것. 주재료의 원산지 혹은 신선도 등에 대해서는 따지지도 못할 정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음식을 다 먹고 난 다음 "이 집 양념 너무 맛있지?"라며 자랑한다나 뭐라나..
이탈리아 요리를 배우는 동안 내가 학습한 건 주재료에 양념을 더하는 것도 좋지만 빼는 것도 중요했다. 가능한 한 양념을 덜 쓰거나 안 쓰는 것. 현대의 이탈리아 요리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요리를 선보이면서 양념 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입맛을 바꾸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런 의미에서 사철 한국에 넘쳐나는 식재료는 마음먹기에 따라 요리천국을 만들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나라라는 생각을 굳히기도 했다. 그 이유는 다음에 소개토록 한다. 아울러 본문에 삽입된 자료사진은 글쓴이가 몸담았던 요리학교의 졸업시험에 출품된 요리로 비니 알레산드로(Bini Alessandro_2016) 학생의 작품이다. 화려해 보이는 이 요리도 알고 보면 과정은 약간 복잡하나 매우 단순한 양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무릇 최고의 요리는 양념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후추 이야기 / Piper nigrum / 후추를 놓고 펼쳐지는 향신료무역 이야기
Piatto_Bini Alessandro ALMA
La scuola Internazionale di cucina italiana
Corso il cuoco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