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기록, 돌로미티(Dolomiti) 19박 20일
어느 날, 함께 역경을 이겨내고 함께 행복해하던 사람이 부재중이라면..?!
우리는 이때부터 정상에서 내려가기 싫었다. 리푸지오 삐쉬아두(Rifugio F. Cavazza al Pisciadù Hütte) 로지가 저만치서 손짓을 했다. 링크를 열어보시면 위키피디아에 소개된 장면과 거의 같은 장소에서 촬영된 풍경 사진임을 알 수 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천천히 정상의 로지로 이동하면서 좀 더 오래 머물고 싶었던 것이다.
또 언제 이곳을 다시 와 볼 수 있을까..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知者樂水)라 했던가. 산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매우 마침맞은 도파민이 분비되나 보다. 돌로미티를 찾는 사람들이 주로 그런 것 같다. 그들은 우리처럼 전혀 불필요한 갈등을 겪지 않으면서 삶을 누리고 있었다. 하루빨리 대한민국도 이들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나라도 거듭났으면 좋겠다.
지난 여정 그곳에서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편 끄트머리에 이렇게 썼다. 잠시 먼 나라에서 조국을 바라보며 느낀 심정을 몇 자 까적거렸다. 한국에서 이탈리아로 떠나올 때는 마음도 몸도 두 번 다시 시사 문제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그러나 하니를 한국으로 보내 놓고 보니 마음은 다시 이탈리아보다 한국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곳은 내가 태어난 조국이자 형제자매들이 살고 있는 곳. 어떻게 나 몰라라 할 수 있겠는가..
이른 새벽에 눈을 떠보니 진공상태로 변한 도시의 한 공간에 늘 보이던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 부재중인 공간.. 다시 사진첩을 열어 동고동락한 한 여자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마음에서 일어났다가 사그라드는 마음들은 모두 육신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겠지..
사진첩을 열어 다시 돌로미티로 향한다. 그곳은 우리에게 죽어도 잊지 못할 장소로 기억될 것이다. 돌로미티의 알타 바디아(Alta Badia)에 위치한 리푸지오 삐쉬아두 정상을 코 앞에 두고 하니가 저만치 앞서간다. 뒤에서 바라본 하니의 걸음은 평소처럼 일정해 보인다. 보폭도 그렇고 몸 자세도 흐트러짐이 없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발걸음이 무거워 보인다. 조금 전 점심을 먹고 난 후여서 그녀를 괴롭히는 식곤증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밥을 먹고 나면 거의 식곤증이 따라다니곤 했는데 그때마다 침대에 드러눕는 법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웬만하면 몸을 움직이며 무슨 일이라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식곤증이 올라치면 그땐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고 있는 게 전부이다.
그런 사람이 점심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털고 일어났으니, 발걸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을 것. 정상의 로지로 이동하는 동안 하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차 다 안다. 그녀는 힘든 여정을 나설 때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앞만 보고 간다'며 습관처럼 말한다. 뒤를 돌아볼 힘 조차 없고 주어진 과제(?)를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 그녀는 삶을 사랑한다. 당신의 삶을 죽도록 사랑한다. 그녀의 좌우명은 '천년을 살 것처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촌음을 아껴 쓰며 최선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 당신의 눈높이는 최상급이다. 특히 여성들의 패션에 관한 한 일가견이 있을 뿐만 아니라 명품을 고집하는 1인이다. 서랍장과 옷장을 가득 채운 옷과 구두는 물론 각종 액세서리가 유명 브랜드로 비싼 값을 치른 것들이다.
그녀는 값이 싸다고 아무거나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다. 싼값에 구입한 물건들은 그만한 값을 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유가 있다. 명품들은 구입할 때 상대적으로 비싼 비용을 치르게 되지만 오래 사용해도 전혀 문제도 없거니와 A/S까지 가능하고, 여전히 멋들어진 빈티지(vintage)를 풍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진첩을 열어 본 그곳의 하니는 나의 증언이 무섭게 나무 작대기 두 개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른 아침에 눈을 떠 보니 방 한쪽에 그녀가 남기고 간 한쌍의 등산용 스틱이 비스듬히 벽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초행길의 돌로미티 여행에서 우리가 천하의 절경으로 발을 들여놓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그저 유명하다고 떠들어대는 돌로미티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었다고나 할까..
대자연 속의 우리 모습..저기.. 두 사람이 길을 걷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의 돌로미티 여정이 19박 20일까지 이어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냥 얼마간 바람이나 쇠고 올 요량이었는데.. 웬걸 돌로미티가 우리의 발목을 붙들며 '가지 말라'며 통사정을 하는 게 아닌가. 돌로미티는 중독성이 워낙 강하여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미궁에 빠진 듯 뒤로 돌아서기 쉽지 않은 곳이다.
그런 까닭에 여정 중에 만난 메라노(Merano)의 한 등산용품점에서 등산화와 함께 새로 구입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스틱은 돌로미티에 첫눈이 오실 때 처음으로 새하얀 눈 위에 콕콕 흔적을 남기며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봐도 무리한 산행이었다. 무리한 트래킹이었다. 지금이 때가 어느 땐데 나무 작대기에 의지한 채 산행을 한단 말인가.
그것도 우리 코 앞에 모습을 드러낸 리푸지오 삐쒸아두의 정상은 해발 2,585미터에 달하고 정상 부근까지 이어지는 길은 험악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런데 하니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인 이유는 잠시 후에 나타났다. 그녀는 "그냥 빨리 돌아가고 싶어..!"라고 말했다. 천하절경을 코 앞에 두고 주유하던 중 갑자기 마음이 돌변한 것이다. 로지 너머에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비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록, 돌로미티(Dolomiti) 19박 20일은 계속된다.
Documento di 19 notti nelle Dolomiti_dall'8 al 28 Agosto 2020
Scritto_il 24 Novembre 2020, Citta' di Barletta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