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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Jan 09. 2021

어느 바닷가에서 만난 귀공자

#8 한국인, 안 가거나 못 가는 여행지

전혀 뜻밖의 만남..!!



브린디시 시는 한 때 아드리아해 너머 그리스와 밀접한 무역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새해 일출을 만났던 타란토와는 지리적인 장점 등으로 매우 대조적이었다고 한다. 기원전 266년에는 로마에게 정복당하고 그리스와 동양을 잇는 중요한 항구로 자리매김했다는데.. 그곳은 다음 기회에 다시 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 도시는 로마 시대 때 황금기를 맞이했고, 브린디시와 로마로 이어지는 아피아 가도(Via Appia)의 중요한 도시이기도 했다.
새해 첫날.. 태곳적 시간을 끌어안고 있는 고즈넉한 바닷가 풍경.. 나는 어느새 전망대가 보이는 곳까지 다가섰다. 잠시 후, 세월을 이기지 못한 오래된 낡은 전망대 위에 서서 아드리아해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자란 듯한 오솔길 곁 풀섶에 쪼그리고 앉아 영롱한 이슬을 머금은 희귀한 녀석들을 만났다. 


지난 여정 그 바다가 나를 불러 세웠다 편 끄트머리에 이렇게 썼다. 나는 전망대로 가는 바닷가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이곳저곳을 살피며 걸었다. 다른 지역에서 흔히 만날 수 없는 풍경이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바를레타의 바닷가와 또 다른 풍경이었다. 나지막한 바닷가에 건설된 또르레 뻰나(Torre Penna) 전망대가 운치를 더해준 것이랄까.. 16세기에 건설된 이 전망대는 주변에 부속 건축물들과 함께 꽤 넓은 공원을 형성하고 있었다. 조깅과 산책로로 마침맞은 곳. 잠시 바닷가 근처만 둘러볼 요량이었지만 전망대까지는 둘러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느 바닷가에서 만난 귀공자




겉으로 보기에 너무 평범해 보이는 바닷가 풍경들.. 오랜 퇴적층 위로 먼지처럼 쌓인 흙에 의지하여 들풀들이 듬성듬성 나있다. 만약 이곳에 전망대가 없었다면 그냥 돌아섰을지도 모를 일이다. 전망대를 지우고 나면 너무 심심한 풍경들.. 나는 이곳에서 뼈를 드러낸 세월의 흔적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나의 유년기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풍경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뷰파인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만치서 한 무리의 조깅족들이 헛둘헛둘 내 곁으로 다가오며 인사를 건넸다. 


-부온 조르노~ ^^

-부온 조르노, 부오나 조르나따! ^^




요즘 나는 잠자리에 들 때마다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의 <어린 왕자_Il piccolo principe>를 자주 듣는다. 우리가 잘 아는 이 책의 내용 때문에 이탈리아 요리에 입문하면서 이탈리아어 듣기 공부에 유용하게 사용한 책이기도 했다. 오늘 포스트에는 어린 왕자를 소환해야 할 이유를 느꼈다. 황량해 보이는 바닷가에서 그를 떠올리기 충분한 장면과 조우했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 (출처: Le Petit Prince)


(상략)... 그리해서 나는 서로 가슴을 열어 놓고 이야기할 만한 사람도 없이 혼자서 살아왔다. 이것은 6년 전 사하라 사막에서 고장을 일으킨 때까지의 일이다. 비행기 엔진에 무엇인가 결딴난 것이 있었다. 그런데 기계사도 승객도 없었기 때문에 그 어려운 수선을 나 혼자서 해치워 보려고 마음먹었다. 내게 있어서 그것은 생사의 문제였다. 겨우 여드레 동안 마실 물이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첫날 저녁, 나는 사람이 사는 곳에서 수만 리나 떨어진 모래밭에서 잠이 들 게 되었다. 그것은 넓은 바다 한가운데서 뗏목을 타고 있는 파선객보다도 훨씬 더 외로운 신세였다. 그러니 해가 뜰 무렵, 이상한 낮은 목소리를 듣고 잠이 깨었을 적에 내가 얼마나 놀랐겠느냐 말이다. 그 목소리는 이런 말이었다.


"아저씨, 나 양 한 마리만 그려 줘."

"응?"

"나 양 한 마리만 그려줘."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화닥닥 일어섰다. 그리고 눈을 비비고 자세히 쳐다보았다. 나를 점잖게 바라보고 있는 어린 친구가 보였다. 여기 있는 그림이 내가 나중에 그린 그의 가장 근사한 초상화다.

물론 내 그림은 모델보다는 훨씬 덜 아름답다. 그러나 이것은 내 탓이 아니다. 여섯 살 적에 이미 어른들 때문에 화가로서의 장래에 낙심하여, 속이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하는 보아 구렁이밖에 그림이라고는 전혀 배운 일이 없었으니까.

그래 나는 눈이 휘둥그래 저 가지고 그 허깨비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사람 사는 지방에서 수만 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이 어린 친구가 길을 잘못 든 것 같지는 않았다. 몹시 고달프다든가, 시장하다든가, 목이 마르다든가, 무서워서 벌벌 떤다든가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사람 사는 곳에서 수만 리 떨어진 사막 가운데서 길을 잃은 아이다운 빛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이윽고 나는 말문이 열려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넌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러나 그 애는 아주 무슨 중대한 일이기나 한 것처럼 가만히 같은 말을 되뇌었다.


"아저씨, 나 양 한 마리만 그려줘."



너무도 이상하니 일을 당했을 때는 그것을 감히 거역하지 못하는 법이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 수만 리 떨어지고 죽을 위험을 당하고 있는 자리에서, 그것이 도무지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은 되었으나, 결국 나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과 만년필을 꺼냈다.


그러나 나는 문득 지리니, 역사니, 산수니, 문법이니 하는 것을 배운 일이 생각나서 약간 성을 내며 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괜찮아. 나 양 한 마리만 그려 줘."



나는 양을 그려 본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내가 그릴 줄 아는 두 가지 그림 중에서 하나를 그려 보였다. 그것은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보아 구렁이의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 어린 친구는 놀랍게도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언제 보아 구렁이 뱃속에 코끼리 들어 있는 그림 그려 달랬어? 보아 구렁이는 아주 위험한 거야. 그리고 코끼리는 아주 거추장스럽고, 우리 집은 아주 조그마해. 난 꼭 양이 있어야겠어. 나 양 한 마리만 그려줘"


그래서 나는 양을 그렸다. 그랬더니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서 한다는 소리가,



"틀렸어! 이건 벌써 병이 잔뜩 들었는데. 다른 걸 하나 그려 줘."


또 그렸다.


"이거 봐, 아저씨. 그건 양이 아니고 염소인데. 뿔이 있으니 말이야."


그래서 또다시 그렸다. 그러나 그것도 먼젓번 것들 모양으로 퇴박을 맞았다. 



"이건 너무 늙었어. 난 오래 살 수 있는 양이 갖고 싶어."


엔진을 뜯기 시작할 일이 급하기에 나는 더 참을 수가 없어, 다시 그림을 아무렇게나 끄적거려 놓고 한마디 툭 했다."이건 상자다. 네가 가지고 싶어 하는 양은 이 속에 있다." 그러자 천만 뜻밖에도 어린 재판관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게 바로 내가 갖고 싶어 한 그림이야. 이 양은 풀을 많이 줘야 할까, 아저씨?"

"왜?"

"우리 집은 아주 조그마하니까 말이야."

"이거면 넉넉해, 내가 준 양은 아주 조그마한 거니까."

"그렇게 작지도 않은데 뭐…… 야! 양이 잠이 들었다."


이렇게 하여 나는 이 어린 왕자를 알 게 된 것이다..(하략)




내가 이 바닷가를 서성이게 된 이유는 불시착이나 다름없었다. 타란토에서 지난해 일몰과 새해 해돋이를 지켜보다가 아피아 가도 방향을 따라 브린디시 시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브린디시 항구로 이동하기 전에 방향을 돌려 바닷가로 오게 됐는데.. 만약 저만치 바닷가에서 전망대가 보이지 않았다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전망대가 나를 유혹한 것이다. 그리고 나지막한 떨기나무 숲으로 조성된 공원 앞에 주차를 해 놓고 전망대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 가면 필경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게 오래된 촉감이었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풍경을 만나게 됐다.



-안녕, 아가야. 이쁘기도 하지..^^

-안넝하세요. 아더씨..ㅋ 



나의 이런 자세는 오래전에 형성되었다. 초등학교(국민학교)에 입학하기도 전 여섯 살 때쯤이었다. 집에서 조금만 발품을 팔면 산골짜기의 맑은 계곡물뿐만 아니라, 졸졸거리며 흐르는 골짜기에서 파릇한 이끼가 돋아난 풍경이 너무도 좋았던 것이다. 고사리 손으로 물을 받아 마시면 속까지 말갛게 변하곤 했다. 그 맛을 한 번 들인 후 친구들과 함께 자주 산골짜기로 놀러 가곤 했다. 이제 백발이 된 친구들..



그땐 놀거리도 몇 안되고, 술래잡기나 벽치기 숨바꼭질보다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걸음으로는 꽤 먼 곳이었다. 그런 오래된 습관을 일깨운 풍경이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어린왕자 책 속의 주인공이 어린왕자를 만나 화들짝 놀란 것과 흡사한 일이 먼 나라 어느 바닷가에서 일어나게 된 것이랄까.. 외계에서 온 듯한 들풀들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들풀들이 바닷가에 널려있는 게 아닌가..



전망대로 가는 오솔길 옆으로 군락을 이룬 들풀들.. 어느 날 어른이 1인이 이러고 놀고 있는 것. ^^



해가 저만치 떠올랐지만 아직 들풀은 이슬을 머금고 있었다. 타란토의 이오니이 바닷가에서 일몰과 해돋이를 하면서 체크된 바닷가 온도는 영상 4도씨의 추운 날씨였다. 간밤에 이곳도 그러했을 게 틀림없어 보였다. 차가운 이슬을 머금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들은 얼마나 싱싱하고 파릇한지 주변의 들풀과 비교가 됐다. 



녀석들을 뜯어(?) 보면서 집으로 돌아온 즉시 녀석들의 정체 파악에 나섰다. 이탈리아 식물도감을 뒤적거려 이름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녀석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다음부터 가능한 검색어를 총동원했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그런 연후.. 이탈리아인들이 얼렁뚱땅 얼버무리며 '풀꽃'이라고 말하는 들풀에 대해 결론을 내렸다. 녀석이 바닷가 거친 땅에 머리를 박고 드러낸 레이스 달린 세련된 옷감이 귀품이 묻어났으므로 귀공자란 이름을 부여했다. 바닷가에서 만난 귀공자..! 



-와 신난다아.. 아더씨 최고야 쵝오..! ㅋ

-(엄지 척) 정말이란다..!! ^^





요즘 잠자리에 들 때면 '책 읽어주는 어플'을 들으며 잠든다. 작은 글씨로 된 책장을 넘기는 건 선호하지 않는 일이자 오래된 일이다. 아이들을 위해 엄마가 읽어주던 동화이든 고전이든 그 무엇이든 검색만 하면 어플들이 주르르 쏟아진다. 뿐만 아니라 자주 검색하는 어플은 포털의 알고리즘에 의해 자동으로 휴대폰에 소개되는 희한한 세상이다. 그 가운데 잠자리에 들 때 자주 열어보는 어린왕자의 대화는 나를 유년기로 데려다주며 미소를 머금다가 잠이 드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은 세상으로부터 배운 지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이 아닐까..



"아저씨, 나 양 한 마리만 그려줘."


*곧 브린디시로 다시 갈 거야..!!

La principessa del mare di Brindisi, Regione Puglia in ITALIA
il 09 Gennaio 2021, La Disfida di Barletta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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