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수원화성의 봄날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그곳에 제비꽃 무리가 산다..!!
어느덧 햇수로 7년 전의 일이다. 나는 조선 왕조 22대 임금 정조대왕(正祖大王)의 효심이 깃든 수원화성에 있었다. 해마다 봄가을이 오시면 수원시(시장 염태영)는 나와 몇몇의 사람들을 초대(팸투어)해 수원화성을 알리곤 했다. 이런 인연 때문에 수원은 오래전 내가 부산에서 서울로 유학을 떠난 이후 제2의 고향으로 불릴 정도로 친숙한 고장이었다.
친숙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수원시 곳곳.. 특히 수원화성 곳곳에 나의 발도장이 무수히도 찍혀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했다. 이탈리아서 잠시 잊고 산 그곳은.. 지난 1월 말 나와 너무 가깝게 지내던 의형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다시 내 가슴에 안겼다. 당신의 필명은 '온누리'였으며 아우님 한 분이 당시의 심경을 가슴에서 지울 수 없는 사람이라는 포스트에 글을 남겼다.
글에서 슬픔이 뚝뚝 묻어났다. 글을 쓰는 지금도 단박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형은 속초에 계시다가 언제인가부터 수원의 지동에 살면서 수원시 알리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세칭 수원에서 당신을 모르는 사람은 간첩으로 불릴 정도였다. 당신의 하루는 취재로 시작해 취재로 마감되곤 했던 것이다.
그런 형을 수원에서 만나는 날이면 잔칫날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마음이 들떴다. 하루 종일 수원화성 곳곳을 싸돌아 다니다 저녁이 되면 나누는 대포 한 잔은 정조대왕님이 우리를 다독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수원은 고향집에서 느낄 수 있는 안락함이 수원화성에 오롯이 깃든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학교에서도 자세히 공부하지 못한 정조대왕에 대한 역사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내가 수원으로 가기만 하면 유년기가 소환되곤 했다.
위 자료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얼마 전에 돌아가신 의형(하주성)의 모습이다. 너무 보고싶다. ㅜ
"애비야! 손자들 한테 매를 들면 안 돼!! ㅜ"
할머니의 다급한 목소리는 자지러드는 듯했다. 우리 집은 7남매를 두었는데 할머니의 손자 사랑은 남달랐다. 할머니는 소사(부천)의 어느 양반댁 규수였는데 어느 날 할아버지와 눈이 맞아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다. 아버지가 맏이였으며 숙부님(작은 아버지)은 두 분이셨다.
아버지는 한의로 인술을 베푸셨고, 작은 아버지 두 분 중에 한 분은 부산에서 꽤 큰 방앗간을 운영하신 부자였으며, 또 한 분은 모 부대 사령관이셨다. 세 분은 모두 돌아가셨으며 그중 한 분은 현충원에서 영면 중이시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에 청상과부로 사셨다.
그런 할머니가 우리에게 정을 듬뿍 주신 것도 따지고 보면 당신께서 살았던 지역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 같다. 서울에서 가까웠던 소사 지역이었으므로 한양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해서 소상하게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할머니는 구한말 조선시대의 사람이었다. 따라서 당시 세간에 떠돌던 사도세자에 대한 소문은 할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은 트라우마나 다름없었다.
어린 형제들이 그런 할머니의 속사정은 알 수가 없었지만 할머니의 입에 담은 영조대왕(사도세자의 아버지)은 분명 나쁜 놈이 틀림없었다. 할머니는 우리의 잘못으로 종아리를 걷게 하고 회초리를 든 아버지를 향해 노발대발하시며 제 아들을 죽인 영조를 욕하고 계셨다.
"아들을 살 뒤주에 가두어 죽인 놈이 애비며 왕이냐! 나뿐놈의 시키..!!"
할머니는 아버지를 영조에 비교하며 사랑의 매(회초리)를 나무라신 것이다. 폭력의 시작은 그렇게 된다는 말씀이셨다. 오죽하면 어떤 사람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라고 했을까. 아버지께서 회초리를 들 땐 이유가 있었다. 형제들 중 누군가가 정직하지 못하고 옳지 못한 일을 한 게 발각되면 우리 형제는 종아리를 걷고 (단체로) 회초리를 맞곤 했던 것이다. 할머니께선 집안의 분위기를 어떻게 아셨는지 아버지께서 매를 드는 순간 구세주처럼 나타나 어린 녀석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할머니께선 안방 문을 활짝 여시며 다급하게 말씀하셨다.
"이놈들아 얼론 도망가! 아부지께 잘못했다고 하고..!!"
그러면 아버지께선 언짢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무이는 아이들 버르장머리 나빠지게.."
우리 형제들이 회초리를 벌 때가 되면 큰 형 더러 회초리를 구해오라고 말씀하신다. 불호령이 떨어진 것이다. 그러면 형은 집 근처에 있는 작은 나뭇가지나 명아주 줄기 같은 것으로 회초리를 만들어 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형제들은 곧 있을 서슬 퍼런 처분에 쫄아들며 스스로 반성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께선 정지(부엌)에서 조용히 동태를 살피시다가 아이들이 대탈출(?)에 성공하면 다독거릴 준비를 하고 계셨다.
어떤 때.. 형이 없을 때는 내가 매(회초리)를 구하러 간 적도 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만만한 회초리가 없었다. 그래서 뒷마당에 걸어둔 가마솥 곁 땔감나무에서 작은 나무 작대기를 가져다 아버지께 갖다 드렸더니 아버지의 근엄한 표정이 확 달라지셨다.
"이눔아 이 몽둥이로 사람 잡겠다.ㅋ"
나의 기억에 이때부터 우리 형제들이 회초리를 버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정조대왕님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 걸 모르시는 분들은 없을 것 같다. 영조는 정조대왕의 못된 할아버지였다. 정조대왕이 당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알현하기 위해 수원화성으로 납시는 능행차 기록이 있다.
이른바 정조대왕 화성능행 반차도(正祖大王 華城陵幸 班次圖)는 수원화성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만들어준 1등 공신이자 대왕의 효심이 만들어낸 위대한 기록이었다. 나와 일행은 어느 봄날 그 기록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서장대에서부터 남포루까지 이어지는 성곽에는 마른풀 사이로 제비꽃 무리가 고개를 내밀고 봄볕을 쬐고 있었다. 그 곁으로 꽃다지 무리가 자지러진다.
서기 2021년 2월 23일 초저녁(현지시각), 내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의 날씨는 화창하다 못해 눈부시다. 수원화성의 성곽을 거닐 때는 이 보다 더 눈부셨지.. 이런 날이면 추억이 하나 더 살아난다. 불과 얼마 전에 돌아가신 형이 가슴속 빈자리 하나를 차지한 것이다. 제비꽃 무리에 그리운 사람들이 오롯이 묻어나는 날이다.
La Primavera della Fortezza di Hwaseong_Suwon COREA
il 23 Febbraio 2021, La Disfida di Barletta in PUGLIA
Foto di YOOKEUN CHANG_GEOGRAF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