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르네상스의 고도 피렌체의 봄맞이
가슴에 남아있는 애틋하고 아스라한 그리움 세 가지..!!
지난 여정(인생은 짧고 갈 곳은 천지빼까리) 끄트머리
철학을 전공한 이탈리아어 어학당의 젊은 선생님의 증언에 따르면, 이 지역의 물과 공기의 오염은 심각하다고 말했다. 아드리아해 북부까지 오염시킬 정도라고 말한다. 그곳은 물의 도시 베네치아가 위치한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300만 명이 더 살고 있는 대도시 밀라노(인구 밀도는 2,000명/km²)를 중심으로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2017년 기준 997만여 명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인구밀도는 23,246 km²로 밀라노 대비 10배가 넘는다. 하지만 서울의 코로나 성적표는 이탈리아와 비교 조차 불가능한 것이다. 두 도시의 지형과 생활문화 등이 시사하는 바 매우 크다.
죽기 전에 한 번 살아보고 싶었던 피렌체에 이어 어느 날 봄나들이를 떠나면서, 인생이 보다 더 길었다면 살아보고 싶었던 장소가 피에솔레였던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짧고 갈 곳은 천지빼까리인 세상에서 매우 제한적인 공간을 누릴 수밖에 없는 인생 후반전이 아닌가.. 히포크라테스의 깨달음 조차 당신이 심혈을 기울인 의술의 한계를 한탄했으니.. 그나마 당신의 건강이라도 잘 지키며 누리고 살아야 할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어쩌면 코로나의 창궐은 집콕 등을 통해 당신의 건강을 잘 돌아보라는 하늘의 신호인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은 넓고 갈 곳은 천지빼까리로 널렸다.
영상, 피에솔레 가는 길 3편
글을 시작하기 전에 관련 포스트 르네상스의 고도 피렌체의 봄맞이에 등장한 풍경들이 어떤 장소에서 촬영되었는지 지도를 펴 놓고 알아보도록 한다. 여러분들이 피렌체를 다녀왔지만 사정상 그냥 지나쳐버린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같은 장소를 두 번 방문하기란 쉽지 않지만 어떻게 아는가.. 어느 봄날 당신이 그 자리에 다시 서게 되거나 이웃분들이 피렌체로 떠난다면 훈수라도 둘 수 있지 않겠는가.
위 자료사진을 잘 봐주시기 바란다. 피에솔레로 가는 길은 파랗게 그어져 있다. 하니와 나는 산 도메니코(SAN DOMENICO) 교회 아래 하얀 점 좌측 하단으로까지 피렌체 시내서 걸어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피렌체에 꼭꼭 숨겨진 명소에 등장한 풍경을 따라 우측으로 휘어진 도로를 따라 걷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류소 세 군데를 지나 근사한 리스또란떼(Coquinarius Fiesole)로 이어지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곳이 인생은 짧고 갈 곳은 천지빼까리란 포스트에 실린 풍경들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번 포스트 <유년기의 미켈란젤로와 나의 꿈> 편은 리스또란떼 근처에서 피에솔레 종점까지 이어지는 여정이다. 속도를 내기 위해 꽤 많은 사진과 영상을 편집했다. 이 포스트가 한국에 살고 있는 이웃분들에게 배달(?)되려면 따끈한 불금을 지난 주말 새벽쯤이 될 것이다. 여러분들의 성원에 힘 입어 매일 한차례씩 아름다운 풍경을 공유할 수 있어서 기쁘다.
이탈리아 코로나 성적표와 사순절의 의미
최근 나의 브런치에 쓰고 있는 글들은 주로 봄맞이에 관한 것들이었다. 일종의 향수병이랄까.. 그중 '서울의 봄'이 자주 등장했다. 만약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지 않았다면 서울의 봄을 자주 뒤적거리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통행이 자유롭고 집콕이 필요 없으며 마스크 착용까지 불필요했다면 싸돌아 다니기 바빴을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세계인들 전부가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 우리는 여전히 부자연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탈리아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잘 아시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Mercoledì delle ceneri)'부터 수그러들던 코로나의 기분 나쁜 부활이 이어지고 있었다. 지난 2월 17일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이었으며, 오는 4월 4일까지 40일은 사순절(Quaresima)이라 부른다. 이탈리아어 혹은 라틴어로 '꾸아레씨마_Quaresima'는 '40일'을 가리킨다.
초대교회에서는 이 기간 동안 부활절 새벽에 세례를 베풀었고, 세례 예비자들이 ‘회개’를 통한 세례 준비기간이었다고 전한다. 재의 수요일과 부활절 날짜는 매년 달라지는데 음력이 기준이므로, 해마다 시간이 달라지며 금년은 2월 17일에 사순절이 시작되는 것이다. 서양에서 음력이 기준이라니 흥미로운 일이다. 아무튼 기독교에서 자주 인용되는 40일의 의미는 상징적인 수이다.
모세는 40일 동안 금식으로 기도했고,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날 수가 40일이다. 또 당신이 부활 후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참 희한한 일이다. 이런 기록도 코로나 시대가 아니었으면 브런치에 썼을까 싶은 것이다.
이유가 있다. 서기 2021년의 사순절부터 부활절까지는 별 일 없으면 모를까.. 코로나가 여전히 기승을 부릴 것으로 판단한 이탈리아 정부와 보건 당국은 오는 3월 15일부터 부활절까지(4월 4일~5일 연휴) 특정 장소를 폐쇄 혹은 봉쇄조치를 할 것이라는 암울한 소식(Nuovo misure in arrivo, Italia chiusa: restrizioni maggiori a Pasqua e nei weekend)이 들려왔다.
코로나 때문이자 이날은 사람들이 붐빌게 틀림없기 때문에 내려질 조치이다. 글을 쓰고 있는 3월 11일(현지시각) 현재, 이탈리아 코로나 성적표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감염자 수와 사망자 수는 괄호 Coronavirus, in Italia crescono ancora i nuovi positivi: 25.673. Le vittime sono 373)와 같다. 하루 감염자 수가 2만 5천 명을 넘어서고 사망자 수는 매일 수백 명에 이르는 것이다. 이런 자료를 들출 때마다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 또 집콕이 일상화되는 때 브런치는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주는 사이다 같은 청량제랄까..
미켈란젤로의 어린 시절
내 앞에는 삐죽하게 솟아있는 사이프러스 나무와 올리브 과수원의 빼곡한 숲 너머로 빨간 기와를 두른 피렌체의 전경이 멀리 펼쳐지고 있다. 피에솔레 가는 길을 걸어서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버스를 타고 그냥 휙 지나치면 볼 수 없는 풍경이 발아래로 펼쳐져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언덕에 서면 약속이나 한 듯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를 떠 올린다.
너무도 잘 알려진 그의 생애에 따르면, 그는 1475년 3월 6일 아레쬬(Arezzo) 근처 봘티베리나의 카프레세(a Caprese in Valtiberina)에서 루드뷔코 디 레오나르도 부오나로티 시모니(Ludovico di Leonardo Buonarroti Simoni)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여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레쬬는 이탈리아 중북부의 토스카나 주였으므로, 그는 어려서부터 파도처럼 밀려오는 듯한 구릉지대(La collina, 언덕)를 늘 보고 자랐을 것이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바라보는 풍경들이 주로 그러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티칸 시(Città del Vaticano)의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 천장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그 유명한 작품, 아담의 창조(Creazione di Adamo_크기 280 ×570 cm).. 그의 영감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그는 행운아이기도 했다. 시쳇말로 촌놈이 출세를 한 것이다. 그 배경에는 그의 아버지가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의 길은 험난한데 피렌체 공국에서 일을 하던 그의 아버지는 미켈란젤로가 공무원이 되어 편안하게 잘 살아가길 바랐다.
아버지와 떨어져 지내던 그의 하루 일과는 망치로 돌을 쪼는 일이었으며 그게 너무도 재미있었다. 유년기를 그렇게 보냈는데.. 글쎄, 책상머리에 앉아있는 공무원이 성에나 찰까.. 이때부터 아버지는 물론 삼촌까지 끼어들어 미켈란젤로를 설득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예술 때려치우면 안 잡아 묵지..!) 어르고 달래 봤지만 말짱 꽝이었다. 하늘의 선택은 미켈란젤로의 편이었다. 그럴 리도 없지만 아버지의 설득이 먹혔다면 오늘날 피렌체는 르네상스라는 빛을 잃은 하나의 작은 도시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오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의 기록에 따르면, 결국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쓴 14세의 소년 미켈란젤로는 당대의 유명한 화가 도메니코 기르란다이오(Domenico Ghirlandaio) 밑에서 그림 공부를 할 수 있었으며, 메디치 가문의 로렌쪼(Lorenzo de' Medici)의 총애를 받으며 일취월장 그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된다. 당시 메디치 가문은 유명한 화가 집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나의 유년기와 어머니
조금 전 하니와 나는 이 길을 걸었다. 멀리 피렌체의 두오모가 보일락 말락 하다.
굽이굽이 언덕길을 돌아서 내려다본 풍경들 속으로 피에솔레로 가는 자동차들이 줄을 잇는다. 역광과 측광이 번갈아 가며 카메라를 괴롭힌다. 나의 시선은 여전히 우리가 떠나온 피렌체 중심으로 향하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흔적과 우리의 삶이 겹쳐져 보이는 곳. 미켈란젤로만 떠올리면 나의 유년기가 절로 떠오르는 것이다.
나의 유년기 일부를 브런치에 가끔씩 끼적거렸다. 툇마루를 지나 현관을 지나면 마당으로 계단이 이어진다. 그 곁에는 어머니와 누나가 자주 손질하던 작은 화단이 있고 계단을 내려서면 우물과 장독대가 나란히 있었다. 장독대와 정지(부엌)는 금남구역이었는데 장독대 바로 옆으로 공방이 하나 있었다. 또 뒷마당 곁으로 작은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으며 작은 언덕 너머로 앞동산이 있었다.
당시 나의 관심사는 두 곳이었다. 장독대 곁에 있는 공방을 오가거나 실개천 건너 앞동산이나 거리가 조금 먼 산골짜기로 동무들과 놀러 다니는 일이었다. 이런 일은 유년기 때부터 시작해 사춘기가 막 시작될 때까지 이어졌다. 큰형의 친구 벌(이하 '형이라 부른다)쯤 되는 공방의 주인은 어린 나의 방문에 대해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어느 날 공방 문을 살며시 열고 빼꼼히 들여다보면 형은 부지런히 석고상(Gesso (materiale))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 날이 하루 이틀 지나면서부터 형과 나는 어린 왕자의 여우처럼 서로 길들여지게 됐다. 형과 친해진 나는 짬만 나면 공방에 들어가 이것저것 소품들을 살펴보며, 벽면 한쪽 전부를 차지한 프레스코화를 감상했다. 강렬한 색채의 비구상 그림은 무엇을 뜻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형은 뭔가 특별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석고상(두상)을 만드는 형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작업 과정 전부를 눈여겨보게 됐다. 신기했다. 당시 형은 미리 만들어 놓은 석고상을 사용했으므로 찰흙으로 석고 뜨기를 하는 과정은 생략됐다. 준비된 원형틀(외형 석고틀)에 적당히 물에 갠 석고를 부어 적당한 두께가 형성되면 응달에 말렸다가 쪼갬쇠를 분해하고 다시 재가공하는 과정이었다.
자료사진 좌측 상단에 피렌체 두오모가 보이고 차도가 보이는 갈래길로 이곳까지 동선을 이어왔다. 두오모 바로 앞에 있는 작은 돔(Basilica di San Lorenzo) 앞에 우리가 살고 있었다.
이때 배운 도둑질(?)은 훗날 중학교에 진학한 후 미술 선생님은 물론 아이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미술시간(실기)만 되면 나는 강사 대우를 받으며 아이들을 지도하게 됐다.(흠.. 조금 웃기는군.ㅋ) 국민학교 2학년 때부터는 내가 그린 그림이 교실 게시판에 늘 붙어있을 정도로 그림에도 소질을 보였다. 교내 사생대회나 포스트 그리기는 입상에서 빠지면 서운할 정도였다. 미술실에도 내가 그린 포스트가 늘 나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그런 반면, 학교 공부는 너무 싫었다. 예습과 복습 시간에 죽마지우들과 들로 산으로 놀러 다녔다. 숙제는 등교시간 직전에 벼락치기로 하는 일이 잦았다. 방학이 되면 제일 귀찮은 일기 쓰기 숙제를 이틀 만에 완성해 놓고 미리 짜 놓은 계획표(일기)에 따라 실천하는 불량학생이자 싸돌아다니기 귀재였다. 이런 일은 중학교 입시 때까지 계속되었지만 용케도 학교에 진학했다. 이때 통지표에는 한 두 과목을 제외하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미미미미미美美美美美..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더니 이런 풍경은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벼락치기가 따라다녔다. 그때 만난 기계가 필름 카메라였다. 싸돌아 다니기+사진기의 환상적인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그게 어언 50년의 세월이 흘쩍 지났다.
유년기에 쫄랑쫄랑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함께 가고 싶었다. 그곳에 가면 눈깔사탕 하나를 입에 넣을 수 있는 곳. 칠 남매의 가정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보기 위해 제발 한 번이라도 아파봤으면 했던 나.. 그런데 희한하게도 아프질 않는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 앞에서 엄살을 떨며 머리를 내밀면 어머니의 투박하면서도 따뜻한 손길이 온도계처럼 이마를 스친다. 그런데 어머니는 "흠.. 아들아, 괜찮단다.." 하신다. 그때가 젤 행복한 시간이었지.. ㅜ
하니와 함께 걸었던 길
서기 2021년 3월 12일 오후(현지시각) 하니와 함께 걸었던 길을 천천히 돌아보고 있자니 애틋하고 아련한 느낌이 물씬 풍긴다. 피렌체서 사는 동안 거의 매일 시내는 물론 근교로 발품을 팔고 다녔으므로, 피렌체 곳곳에 우리의 흔적과 그녀를 향한 추억이 오롯이 묻어나는 것이다. 이런 생각 조차 코로나 시대가 간섭했음은 물론이다. 요즘 한국에 가 있는 그녀와 통화 중에 피렌체나 피에솔레는 안중에도 없다. 우리의 삶은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처럼 빠른 물살에 대책 없이 떠내려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마침내 피렌체가 멀리 내려다 보이는 피에솔레 언덕 위에 도착했다. 지금부터 토스카나의 주의 숨겨진 명소를 만나게 될 것이다.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나의 유년기와 미켈란젤로의 유년기는 물론 사람들이 저마다 겪은 유년기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글 제목을 유년기의 미켈란젤로와 나의 꿈으로 써 놓고 서로 다른 삶을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의 꿈은 돌덩어리 혹은 대리석 속에 갇혀있는 천사를 구출해 내는 일이었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 그림은 요청에 따라 하는 수 없이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을 뿐이다.
하지만 갈레리아 델라 아카데미아(Galleria dell'Accademia)에 있는 작품을 보면 그는 조물주가 한 팔을 내어준 것처럼 창조자의 손길이 진하게 느껴졌다. 마치 살아있는 듯한 다비드(DAVID)상은 남자 사람인 내가 봐도 섹시함이 느껴질 정도이므로,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에 있는 모조품(다비드상) 조차 관광객들과 여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었다. 미켈란젤로의 꿈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예술가였고, 공부 안 하고 싸돌아 다니기 좋아했던 나는 세상에 널린 조물주의 걸작들을 찾아내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계속>
La primavera fiorentina del Rinascimento_FIESOLE
il 12 Marzo 2021, La Disfida di Barletta in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