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사람들이 잘 모르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 신비한 체험
방황하는 당신에게 꼭 필요한 신의 그림자..!!
관련 포스트(지상 최고의 해돋이와 신비한 체험) 중에서
내가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게 된 건 해돋이가 막 시작된 시점이었다. 비에드마 호수 위로 여명이 밝아오면서 마침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돋이가 시작된 것이다. 목소리는 감동에 젖어 떨렸으며 흐느끼는 듯한 느낌이 묻어있었다. 남자의 목소리였으며 내 육신의 아버지 목소리와도 닮은 듯했다. 나는 사방을 둘러봤다. 산중에는 나 혼자 밖에 없었다. 알 수 없는 환청을 듣게 된 것이다. 나는 아이들처럼 덩달아 흐느끼며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이때부터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몸을 가눌 수 조차 없었다. 그리고 자동차 크기만 한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해돋이 장면과 피츠로이를 번갈아 가며 뷰파인더에 담기 시작했다. 바위에서 잠시 벗어나 피사체를 향하면 금세 카메라가 바람에 날렸다. 그런 횟수가 포스트에 담긴 사진 수만큼 길게 이어졌다.
나는 이때 만난 해돋이 장면을 영원히 가슴에 묻고 싶었다. 그리고 죽기 전에 기회가 닿으면 하니의 그림과 함께 전시회를 열어 여러분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그러나 하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내가 좋아하는 남미 최초의 노밸문학상 수상자 가브리엘라 미스뜨랄의 <예술가의 십계명>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사진 한 장을 눈여겨 봐 주시기 바란다. 온통 바위 투성이인 검독수리 전망대 꼭대기의 풍경이다. 사진 좌측 하단에 내가 메고 온 배낭과 보조가방이 보인다. 배낭 속에는 약간의 과자 부스러기와 생수가 들어있고 렌즈가 각각 나뉘어 들어있다. 내가 선 자리는 큰 바위 뒤쪽으로 바람을 등진 곳이다. 사진 한 컷 한 컷을 남길 때마다 현재의 위치에서 아주 잠시 벗어나야 해돋이와 반대편의 피츠로이 산군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여울목을 흐르는 물소리처럼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목의 저항으로 쉭쉭 소리를 낼 뿐이다. 바위 뒤에 숨었다가 피사체를 바라보는 순간 몸이 휘청거린다. 카메라가 금세 날아갈 듯하다. 눈에 보이는 물질의 세상과 보이지 않는 비물질의 세계가 공존하는 곳. 중부 파타고니아에 우기가 찾아드는 것이다.
남반구의 계절은 주로 우기와 건기로 나뉘는데, 남반구에서 건기는 4월부터 9월까지이며 우기는 반대의 계절을 말한다. 우기가 시작되면 우리나라의 가을 날씨를 연상하면 된다. 평원과 산중은 단풍으로 물들고 곧 추위가 찾아드는 계절인 것이다. 그래서 떨기나무들과 바람을 피해 납작 엎드린 나무들이 바위와 함께 살아가는 이곳의 풍경은 묘하다. 그곳에 신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나의 브런치를 통해 자주 언급되는 신의 그림자에 대해 독자님들과 이웃분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관련 브런치에서 '신의 그림자' 출처를 여러 번 언급하고 있지만, 환청을 체험한 현장에서 다시 한번 더 복습하면 이러하다.
예술가의 십계명 _가브리엘라 미스뜨랄
첫째, 우주 위에 존재하는 신의 그림자인 아름다움을 사랑하라.
둘째, 무신론적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주를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그와 유사한 존재를 만들어 놓고 그를 섬기라.
셋째, 아름다움을 감각의 미끼로 주지 말고 정신의 자연식으로 주어라.
넷째, 방종이나 허영을 위한 구실로 삼지 말고 신성한 연습으로 삼아라.
다섯째, 잔치에서 너의 작품을 찾지도 말 것이며 가져가지도 말라. 아름다움은 동정성이며 잔치에 있는 작품은 동정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 너의 가슴속에서 너의 노래로 끌어올려라. 그러면 너의 가슴이 너를 정화할 것이다.
일곱째, 너의 아름다움은 자비라고 불릴 것이며 인간의 가슴을 기쁘게 해 줄 것이다.
여덟째, 한 어린아이가 잉태되듯이 네 가슴속 피로 작품을 남겨라.
아홉째, 아름다움은 너에게 졸림을 주는 아편이 아니고 너를 활동하게 하는 명포 도주다.
열째, 모든 창조물 중에서 너는 수줍어할 것이다. 너의 창조물은 너의 꿈 보다 열등했으며 동시에 경이로운 신의 꿈인 자연보다도 열등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종교가 있고 그에 따른 신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참고로 지구촌의 주요 종교와 신자 수는 상상 외의 모습이다. 신자 수에 따른 주요 종교는 이러하다. 기독교(23억 명), 이슬람교(18억 명), 힌두교(11억 명), 불교(5억 명), 중국 전통 신앙( 3억 9천4백만 명), 부족 신앙(3억 명), 아프리카 전통(1억 명), 시크교(2천3백만 명), 스피리티즘(1천5백만 명), 유대교(1천5백만 명), 바하이교(7백만 명), 자이나교(4백2십만 명), 신토(4백만 명), 까오다이교(4백만 명), 조로아스터교(2백6십만 명), 천리교(2백만 명), 원불교(148만 명), 유니테리언주의(80만 명), 라스타파리 운동(60만 명), 사이언톨로지교(50만 명)..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순으로 신자 수가 많으며 우리에게 익숙한 종교들이다. 나는 이 가운데 기독교에 겨우 발을 들여놓은 정도이며, 대략 16년 동안 심취한 바 있다. 그랬던 내가 어느 날부터 가브리엘라 미스뜨랄을 언급하며 신의 그림자를 들먹거리고 있는 것이다.
첫째, 우주 위에 존재하는 신의 그림자인 아름다움을 사랑하라.
어떤 사람들은 모태신앙으로 평생을 집에서 교회로 삶을 통째로 기독교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숱하게 봐 왔다. 그들을 주관하는 신은 '주님' 이자 '하느님'이었다. 그런 반면에 나는 유소년기 때부터 불교문화 혹은 유교문화가 강한 집안에서 자라며 불교를 어깨너머로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보다 불교가 보다 빨리 전파된 탓에, 유교문화와 뒤섞여 종교의 정체성이 모호한 시대를 살았던 것이다.
그런 어느 날 나는 신심이 가득한 지인으로부터 서서히 코(?)를 꿰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부터 기독교의 통과의례를 겪으며 마침내 모 대형교회에서 침례를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 조직에 서서히 길들여지게 된 것이다. 집안 전체를 통해 나 혼자 혹은 우리 가족만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적지 않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기독교가 원하는 신앙생활을 지키려다 보니 대를 이어 내려온 집안의 문화와 충돌하기 시작한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펑펑 울면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당시 형제들이나 집안의 어른들이 나의 이 같은 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정치와 종교적 이념은 무리로부터 왕따를 자초하는 행위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일이 생긴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광화문은 물론 이곳저곳을 무리 지어 다니는 사람들과 짝퉁 목회자를 이해하는 것도 이때 생긴 것이다. 통과의례를 겪으면 새로운 집단의 문화에 동화되어 그들과 함께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세계가 종교집단인 것이다. 그런 집단 중에 가장 큰 집단이 기독교이며, 여타 종교에서도 그들의 신심을 배척하거나 짓밟는 행위가 생기면 목숨을 걸고 당신이 믿는 신을 지키는 것이다.
참 희한한 종교의 모습이다. 종교의 기원에 따르면, 자연의 신비와 능력에 대한 숭배에서 왔다는 자연 숭배 이론이 있다. 또 심리학적 이론은 감정적 상태에서 성장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사회적 이론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발생했고 부족을 단결하는 힘이라고 말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수메르 도시 국가들의 종교들은 정치적인 권력과 사회, 경제적인 질서를 신성한 것으로 보았다는 것.
사회를 통합하는 한 형태가 종교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또 영(靈)들이나 죽은 조상들의 영혼을 숭배하는 것에서 왔다는 정령숭배 이론도 있다. 이런 종교들의 특징 내지 공통점은 초자연적인 것을 믿으며, 현상과 현실을 구분 짓고 기도를 통해 신과 교통을 하는 등 사회적인 조직체로 거듭나는 것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성황당(城隍堂)의 성황신도 다를 바 없었다. 따라서 고대로부터 신과의 관계 속에서 시작된 종교에 대해 학자들은 서로 다른 견해를 내놓는다.
칸트(Immanuel Kant)는 "의지 곧 실천 이성에 기초를 두고, 종교를 이성의 한계 안에 가둔다."라고 말했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종교의 자리가 지성 속에 있다고 본다."라고 했다. 마르크스주의로 널리 알려진 칼 맑스(Karl Marx)는 "종교는 인간의 발전에 방해물로 인간은 스스로가 구원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등.. 학자들은 종교를 인간의 지, 정, 의, 도덕, 이성 등 각각 하나를 강조하며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 한편, 종교의 본질 속에 포함된 신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호한 입장이다. 신이 있다면 그 실체가 무엇인지 어떤 모습인지 언제 만날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다. 그런 반면에 내가 가끔씩 인용하는 '신의 그림자'는 보다 구체적이다. 신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누구든지 얼마든지 원하기만 하면 아무 때나 친견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전술한 가브리엘라 미스뜨랄의 <예술가의 십계명> 중 첫째 계명"첫째, 우주 위에 존재하는 신의 그림자인 아름다움을 사랑하라."이 그것이다. 종교에 대해 관심이 없으신 분들은 정말 따분한 글일 테지만, 외롭고 고독하며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계에서 이 같은 계명보다 더 나은 신의 모습을 만나본적이 없다. 종교에 귀의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신을 친견할 수 있으며, 특정 종교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도 아무 때나 값 없이 만날 수 있는 신이 당신의 주변에 '천지 빼까리'로 널려있는 것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사람을 구속하는 통과의례는, 전혀 불필요한 다단계 사업 혹은 조직사업의 일환일 뿐인 것이라고 말하면 발끈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은 다시금 당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봐야 한다. 물론 나의 주장 사실이다. 서두에 잠시 언급한 바 눈에 보이는 물질의 세상과 보이지 않는 비물질의 세계가 공존하는 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이다.
파타고니아 여행 중 어느 날 산중에서 환청을 경험할 때 세찬 바람 속에서 들려온 생생한 아버지의 육성이었다. 짧은 메시지 속에는 나의 삶을 재인식시켰을 뿐만 아니라 세계관과 우주관을 통째로 뒤흔든 사건이었다. 자연계와 영계.. 그 영역을 뚜렷하게 구분해 놓은 사건이 검독수리 전망대 꼭대기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내게 작은 깨달음을 준 한 사건을 통해 '신은 늘 우리 곁에 머물면서 우리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 믿는 것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마음이 생기는 순간부터 신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반대의 경우에는 지옥의 바다가 들끓고 있을 것이며, 싯달타가 여러 해 방황한 끝에 얻은 깨달음의 세상이다. 그는 '인생은 왜 고통의 바다인지, 고통을 극복하는 법은 없는지' 등을 알아내기 위해 수행을 시작했고, 보리수 밑에서 니르바나(nirvāṇa. 열반, 涅槃)를 통해 진리를 깨달은 자 '붓다(Gautama Buddha)'가 됐다.
이때 니르(nir)는 '꺼지다'라는 뜻이며 바나(vana)는 '불'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번뇌의 불이 꺼지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분노, 어리석음 등 온갖 번뇌가 다 소멸된 궁극적인 경지가 당신의 위대한 깨달음인 것이다. 세상의 교주는 주로 이렇게 큰 울림으로 우리네 삶을 다독거리며 장차 맞이하게 될 죽음 이후의 세상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싯달타처럼 부귀영화를 버리고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긴 쉽지 않다. 그리하여 생활인의 모습으로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며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삶이 신도 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신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거나 감추고 있는 게 종교의 한계라고나 할까..
영계는 자연계를 어떻게 할 수가 없으며 자연계 또한 영계에 대해 그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이른바 질량보존법칙(質量保存法則)은 상호 동일한 것이다. 다만, 신께서는 세상 만물을 지으신 후에 인간에게 여타 생물과 다른 관조 법을 부여했다고나 할까.. 안간에게 유독 욕망을 부여하는 한편, 부끄러움을 주셨다. 그와 함께 아름다운 현상을 만나면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실로 신묘막측한 영적존재를 만든 것이다. 욕망과 대칭을 이루는 부끄러움과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루도록 한 것이다.
신의 그림자를 설명하기 위해 자료를 참조해 가며 길게도 끼적거렸다. 살아오면서 종교에 대해 잠시 맛을 본 것도 코로나 시대와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등장한 미생물이 지구의 역사를 바꾸어 쓰고 있는 것이다. 지구의 역사를 바꾼 전염병은 황열병(黃熱, yellow fever)이나 장티푸스 콜레라 페스트 등이다. 이들의 매체는 모기로부터 시작되었거나 쥐나 물이 문제였으며 오염된 생활환경이 큰 작용을 했다.
우리가 하찮게 여겼던 모기들이 바이러스를 등에 업고 인간을 해친 것도, 수인선 전염병인 장티푸스는 세균이나 바이러스 등으로 오염된 물이 만든 전염병인 것이다. 청결하지 못한 위생상태가 만든 것들이다.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복습해 오면서 현대에 이르고 있다. 인구 1천만 명이 살고 있는 대도시의 시스템에는 깨끗한 물이 넘쳐나고 있으며 청결은 일상이 된 것. 불과 100년 전에 볼 수 없던 시설을 갖춘 사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촌을 발칵 뒤집어 놓은 코로나 19란 녀석은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길래..
엄청나게 많은 신도들이 믿는 수많은 종교가 해결할 수도 없는 일이 예나 지금이나 이어지며 인간의 귀중한 목숨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어떤 종교인들은 "코로나야 물렀거라! 훠이 훠이~"하는 차마 웃지 못할 해프닝을 연출하고 있었다. 신께 빌고 또 빌어도 신은 여전히 묵묵부답.. 신은 인간을 버린 것일까..
전제한 칼 맑스의 통찰력 "종교는 인간의 발전에 방해물로 인간은 스스로가 구원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종교의 허상으로부터 탈출을 해야 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을 발명하고 비행기를 발명하는 등 최소한 바로크 시대 이후로부터 초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지만, 음악이나 미술 철학 등 인문학(人文學) 분야는 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세상 모든 교육 과목들이 돈벌이 수단에 빠져있는 동안, 우리의 존엄성과 가치를 지켜줄 신은 종교와 그들 조직 속에서 졸고 계신 것이다. 코로나는 인간계의 영역이자 영계에서 조율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노동절 연휴를 앞둔 이탈리아의 풍경은 마냥 들떠있다. 사람들의 통행이 잠시 차단되지 않는 한 코로나는 우리 곁에 보다 오래 머물 것이다. 하찮은 미물로부터 만물의 영장이 힘 없이 쓰러져간 역사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대재앙을 알려고 하지 않거나 모르고 있는 것이랄까..
서기 2021년 4월 30일(현지시각), 내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에서 사진첩을 열어 신의 그림자를 보고 있다. 더 이상 황홀할 것도 없는 황홀경이 내 앞에 펼져지고 있는 것이다. 아직 어슴푸레한 검독수리 전망대에서 바라본 해돋이는 신의 간섭이 없으면 등장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신께서 어느 날 나를 불러 지상 최고 최대의 쇼를 선물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람은 여전히 세차게 불고 있었다. 그런 잠시 후 이른, 새벽어둠을 뚫고 나를 인도한 알 수 없는 힘이 신의 손길이었음을 느끼게 된다. 죽기 전에 단 한 차례 볼까 말까 한 파타고니아의 장엄한 해돋이가 피츠로이 산군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것이다. 감동의 도가니란 이럴 때 사용하는 말이었다. <계속>
PATAGONIA_Sentire la voce di suo padre sul monte Fitzroy
il 30 Aprile 2021, La Disfida di Barletta in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