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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Oct 10. 2021

그 산에 첫눈이 왔을까

-하니와 함께 다시 찾은 돌로미티 여행

당신의 어머니와 조국을 생각나게 하는 깊은 산중에서..



   산중 곳곳으로 연결된 참호는 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상상할 수 있는 흔적들이었다. 세월은 가도 옛날의 흔적은 남는 것인지.. 여행자의 시선을 오랫동안 붙들었다. 1차 세계대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군인들이 참호를 중심으로 처절하게 싸우다가 전사를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들은 "지옥이 있다면 참호가 바로 지옥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전대미문의 전쟁이 1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났으며, 천만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 각국의 군대들이 파 놓은 참호의 길이는 수천 킬로미터 이상이었다. 한 사람이 겨우 비켜갈 수 있는 참호 속에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했고, 그 속에서 4년 동안 적대국과 대치하는 지긋지긋한 전쟁이 이어졌던 것이다. 기록은 당시의 모습을 '생지옥'이라고 묘사했다. 나는 당시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참호 속을 천천히 걸으며 그들의 혼령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혼령들이 참호 속을 바쁘게 다니고 있었으며, 그들은 적군의 총알과 포격을 피해 이리저리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을 다룬 이탈리아의 뜨렌티노 전선(IL FRONTE TRENTINO

NELLA PRIMA GUERRA MONDIALE)의  자료(첨부)를 살펴보니, 뜨렌티노는 오스뜨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다. 



전쟁이 발발한 1914년 첫해에 징집된 인원만 5만 5천 명에 이르렀으며, 그들은 러시아 군대와 싸웠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혔으며 11,400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1915년 5월에는 이탈리아가 오스뜨리아-헝가리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뜨렌띠노는 전쟁의 캠프가 되었다.



이 전투로 수 백 킬로미터의 참호가 만들어졌으며 마을은 폭격을 당했다. 여자들과 노약자들은 집을 떠나야 했으며, 산중에 남아있는 군인들은 눈 속에서 지내도록 강요되었다. 한겨울.. 이탈리아군과 오스뜨리아-헝가리 연합군이 티롤 지역에서 전투를 하던 중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참호 속에서 치러지는 전쟁 중에 이번에는 눈사태가 난 것이다. 눈 덮인 봉우리에서 눈사태가 났으며, 세 나라의 병사 1만여 명이 눈사태로 목숨을 잃었다. 그때가 1916년 12월이었다. 



기록은 이러하지만 우리가 돌로미티 여행을 하면서 체감한 온도에 따르면, 8월 중에도 겨울 같은 날씨였으므로 동사하거나 그에 준하는 고통을 호소한 병사들이 숱하게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병사 1만여 명이 눈사태로 목숨을 잃었던 당시에는 평소와 다른 폭설이 내렸고, 양측 군대는 더 높은 봉우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결과 군대와 병사를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참호와 동굴을 만들기 위한 폭파가 참상을 부른 것이다. 터널 건설과 전투 등으로 눈사태를 불러온 것이다.




병사들의 이런 헛된 죽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1918년까지 계속 이어졌으며, 종전될 때까지 이손쪼 강(fiume isonzo)을 사이에 두고 14번의 전투가 더 벌어졌다고 한다. 돌로미티 곳곳에 남아있는 참호를 통해 당시의 참상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당시를 돌아보니 우리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기 깊숙한 곳에 있을 당시였다. 부모님이 태어날 당시였으며 조모님이 건강하게 생존해 있을 때였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종전이 된 후 대한민국은 외세에 의해 통일되는 우여곡절 등을 통해 끔찍한 동족상잔을 겪으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6.25 동란을 거친 우리에게 남은 짐은 생각보다 컸으며, 오랫동안 우리 민족을 괴롭혀왔다. 이번에는 청산되지 못한 일제의 잔재, 즉 적폐 세력들이 우리 민족을 못살게 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군사독재 정권에 빌붙은 정치검찰이자 사법부이며 이른바 기득권 세력들이었다. 서슬 퍼렇던 시절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검사들이 정치를 일삼고, 사법부는 정치적 판단으로 민주시민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내 조국 대한민국을 떠나 이탈리아서 지내는 동안 열어본 한국의 정치판은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개판의 중심에는 정치검찰이 있었으며 그들은 선량한 민주정부의 사람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국민들이 뽑은 대통령의 목에 칼을 겨누는 오만방자함 이상의 행태로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다. 그럴 리라 없겠지만.. 왕이 통치하던 조선시대 등 옛날의 왕조로 시간을 돌리면, 그들 전부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능지처참 형을 당할 인간들이었다. 또 어떤 인간은 손바닥에 임금 왕(王) 자를 쓰고 그가 저질러 놓은 죄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웃픈 꼬락서니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 여정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는가 편에서 이렇게 끼적거렸다.



그 산에 첫눈이 왔을까




   서기 2021년 10월 9일(현지 시각), 우리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에서 돌로미티 여행 사진첩을 열어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명은 두 가지가 있단다. 즉 바꿀 수 없는 없는 운명이란 '어머니와 조국'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개명을 하기도 하고 국적을 바꾸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운명이 바뀌지 않는다. 껍데기는 달라졌을 망정 속 알맹이는 그대로인 것이다. 



우리가 야영을 하고 있는 돌로미티의 빠쏘 퐐싸레고 계곡은 장엄한 산세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다. 하니와 함께 주차장에서부터 걸어온 친퀘 또르리.. 그 산중에는 저만치 다섯 봉우리들이 우뚝 솟아있고 능선 주변으로 참호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주로 승강기를 타고 이곳에 도착한 여행자들은 참호를 따라 이동하며 오래 전의 참상을 기억해 내고 있었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한 시점은 8월 중순이지만 날씨는 차가웠다. 아니 추웠다. 우리가 만난 아침 최저 기온은 영상 3도씨였다. 8월의 날씨가 이러한데 겨울의 날씨는 상상밖이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리는 것이다.



깊고 높은 산중에 참호를 파 놓고 생활하던 병사들.. 그들은 전쟁에 지쳤을 것이며 추위에 떨며 곧 다가올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포자기한 삶이 참호 속에서 전개되는 동안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다행히 살아남아서 돌아간 병사들은 두 번 다시 이곳을 찾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 같다.



병역의무를 마친 우리나라 남자 사람들은 "그곳을 향해 소변도 보지 않는다"라고 말할 정도이다. 군대라는 폐쇄적인 조직이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군대를 다녀와야 남자가 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시간을 지내놓고 보니 그것 또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이었다. 전쟁이 없는 나라.. 전쟁을 겪지 않아도 되는 나라.. 그런 세상을 손꼽아 기다린 병사들이 이 산중을 지키지 않았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 이틀 동안 비가 오셨다. 추적추적 시도 때도 없이 비가 오셨다. 본격적인 우기가 시작된 것이다. 비가 오락가락하던 날 하니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그 산에 첫눈이 왔을까..?!"



지난해 9월 24일경, 돌로미티의 치비아나 골짜기(Il Passo Cibiana (1.530 m))에서 첫눈을 만났다. 세월이 속절없이 흐르면서 어느덧 시월이 다가오자 그녀는 문득 당시의 돌로미티 풍경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돌로미티의 날씨를 살펴보니 조석으로 기온차(최저 영상 1도씨부터 21도씨까지)가 많이 나고 있었다. 구름이 낀 날씨가 며칠간 이어지는가 하면 맑은 날이 더 많았다.



아직 돌로미티는 눈 소식이 없었다. 그 대신 바를레타에는 보슬비와 소낙비가 오락가락하고 있는 것이다. 돌로미티의 빠소 치비아나 골짜기에 내린 첫눈은..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진 후에 기적처럼 산봉우리를 하얗게 만들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 아름답게 남겨진 첫눈은 그렇게 당신을 유혹하고 있었을까..



돌로미티의 첫눈 여행은, 다시 빠쏘 치비아나 디 까도레(Passo cibiana di cadore), 아우론조 디 까도레(Auronzo di Cadore)를 따라 미수리나 호수(Lago Misurina)와 라고 단또르노(Lago d'Antorno)를 거쳐 꼬르띠나 담빼쬬(Cortina d'Ampezzo)까지 진출했다. 지금 우리가 머물고 있는 친퀘 또르리 능선은 담빼쬬에서 멀지않은 골짜기에 위치한 곳이다.



초행길의 돌로미티는 우리를 전혀 상상 밖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은 적 있다. 전혀 뜻밖의 일이 기적처럼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돌로미티로 아예 이사를 할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지난해 9월 24일이었으며 그곳에서 첫눈이란 행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첫눈.. 그게 다 뭐라고.. 삶과 죽음 앞에서 촌음을 다투던 병사들에게 첫눈에 대한 기억은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을까.. 이 험악한 산중에 비는 물론 눈이라도 오시면 어머니와 조국을 원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누구든지 그러하지 않을까..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세상 만물이 신기하고 사랑스럽게 보일 테지만.. 반대의 경우에 직면하면 저주를 퍼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돌로미티 사진첩을 열어놓고 당시를 회상하고 있자니 어머니와 조국의 형편이 절로 떠오르는 것이다. 우리 선조님들은 이런 경우의 수를 일제강점기로부터 지금까지 겪어오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첫눈이 하얗게 쌓인 돌로미티를 그리워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후손들 앞에 놓인 여려 경우의 수를 계수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먼 나라에 살고 있어도 겉모습은 물론 속 사람까지 여전히 어머니와 조국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



첫눈이 오시면.. 그 산중에 첫눈이 오시면.. 당신의 가슴속까지 도화지처럼  하얗게 변했으면 좋겠다.


Le Dolomiti che ho riscoperto con mia moglie_Le Cinque Torri Dolomiti
il 09 Ottobre 2021, La Disfida di Barletta in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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