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리 동네 바를레타에서 7일 동안 생긴 일
시간은 누구에게나 기회는 단 한 번..!
서기 2021년 12월 16일 저녁나절(현지시각), 우리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에서 사진첩을 열었다. 사진첩의 기록은 대략 한 달 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하니의 그림 수업 장면 등이 빼곡했다. 우리의 일상이 거의 매일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나의 오래된 습관이며 국민학교(초등학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기록은 주로 방학숙제로 주어진 것으로 한 달치 분량이다. 평소에는 나가서 놀기 바쁜 녀석아 일기는 무슨.. 그래서 놀기 바쁜 녀석이 꾀를 내기 시작한다. 방학식이 끝나자마자 앉은뱅이책상 머리에 앉아서 열심히 열심히 잡기장에 일기를 끼적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머니께선 그런 나를 보고 "낼부터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하고 웃으셨다.
공부 안 하고 나가 노는데 정신 팔린 녀석이 책상 앞에 앉아있는 모습이 신기한 것이랄까.. 그런데 뺀질거리는 녀석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잡기장에 한 달치 일기를 전부 써 놓는 것이다. 그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을 기억해 가며 가짜 일기를 미리 써 놓는 것이다. 일기란 놀기 바쁜 녀석에게 큰 짐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숙제 중에서 일기가 제일 힘든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꾀를 짜낸 녀석은 잘 놀다가도 어떤 때는 일기장에 미리 써 놓은 미래의 일들을 현재에 적용해 보는 놀라운 잔머리를 굴리곤 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봐도 재밌는 녀석..
그러나 이런 잔머리도 상급학교로 진학하면서부터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없다. 까이꺼.. 일기가 다 뭐라고.. 이때부터는 실전이 시작되고 청년기를 지나 본격적인 인생 수업이 시작되면 기록은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굵직한 사건(?)만 메모해 두면 되는 것이다. 그런 어느 날부터 인터넷이라는 도구가 생겼으며 그때부터 메모는 물론 우리네 삶의 모든 기록들이 잡기장에서 컴퓨터로 이동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인류문화사 이래 최고의 기록 수단이 등장한 것이다. 글과 그림은 물론 사진과 영상까지 또 각종 도표까지 그 어떤 표현도 가능해진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귀신 곡할 노릇이란 말이 이럴 때 사용하라고 나온 게 아닐까.. 어떤 때는 부처님 손바닥에 올라간 세상이라더니 지금은 그것마저 소용없게 됐다. 세상을 그야말로 손아귀에 쥘 수 있는 휴대폰이 등장한 것이다.
지구촌이란 표현도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은 지구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한 가족처럼 특정 공간에 머물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서 대한민국까지 눈 깜빡할 시간에 이동하고 메시는 물론 음성과 영상을 주고받는 귀신 까무러칠 세상이 된 것이다. 이렇게 찰나의 순간에 소통이 되는 4차 혁명의 시대에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게 말이나 될까.. 싶지만 그게 말이 되는 것이다.
마음대로 안 되는 여럿 중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할 때까지 쉼 없는 노력이 더해져야 하는 일. 요즘 하니가 그 일을 해 내고 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청춘 때는 남아(?) 돌던 시간들이 안 청춘 때는 시간에 쫓겨다니는 것이다. 그 장면을 지난 편에 이어 다시 이어나가고 있는 것.
우리는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살아보고 싶었던 미켈란젤로의 도시 퓌렌쩨서 살았다.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소원을 이룬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바를레타 출신의 한 예술가를 만나 둥지를 이곳으로 옮기게 됐다. 재차 삼차 수차 언급하는 일이다. 내가 한 일을 우격다짐으로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면 그걸 '꼰대'라 하고 스스로 실천해 보이면 '멘토'라고 하는가..
안 청춘이 되면 당신 스스로 깨우친 경험칙을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생각 굴뚝같을 것이나 그런 일은 당신의 자식이라 할지라도 먹히지 않는다. 성인이 된 후에는 모두 스스로의 책임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경험을 기록해 두는 것은.. 언제인가 여러분들이 잊고 살았던 일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은 것이다.
제한된 우리네 삶에서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경험할 시간은 많지 않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기회는 단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것이랄까.. 그 누군들 100년을 살고 싶지 않을까.. 마는 100세에 다다를 즈음에는 또 다른 욕망이 당신께 찾아들 것이다. 이번에는 110년까지 더 살아보고 싶을 게 아닌가.. 말도 안 돼.
우리가 바를레타에 둥지를 다시 튼 이후 잠시 돌로미티를 다녀온 후에는 일주일에 세 번씩(월 수 금) 하니의 그림 수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녀가 평생을 미룬 소원이 그림 그리기였지만, 한국에서 다년간 그림에 매달렸어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을뿐더러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들은 늘 불만이었다. 한국 화단의 고질적인 병폐가 그녀의 작품에 묻어나면서 '당신만의 작품'으로부터 멀어진 것이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게 된 기초 과정이 소묘(Disegno)였다.
루이지의 지도로 이어지고 있는 소묘 수업은 그녀를 매우 만족스럽게 만들었다. 하루 3시간씩 이어가고 있는 수업은 까발레또(Cabaletto, 이젤) 앞에서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무념무상.. 그녀는 집중에 집중을 더하며 행복해하는 것이다. 최근 두 달 동안 그녀의 소묘 작품은 눈에 띄게 달라졌으며, 루이지로부터 "흡족하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한 달에 12번의 수업이 그녀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 장면들을 곁에서 지켜보며 기록하는 나 또한 흡족해하고 있는 것.
그림 수업 초기에는 루이지의 질타가 이어지면서 기가 많이 꺾이기도 했다. 그때마다 "소질이 없는가 봐.. 그만두고 싶어"라며 투덜거리곤 했던 그녀가 요즘은 수업이 있는 전날부터 소풍 가는 날을 계수하는 아이들처럼 설레곤 하는 것이다. 또 수업이 끝나면 피곤할 텐데 그녀를 흥분시킨 만족감 내지 성취감은 능력 이상의 체력을 소모시키다가 잠시 후 곯아떨어지곤 한다.
나의 유년기.. 잔대가리 굴리며 한 달치 일기장을 미리 써놓고 동무들과 놀기 바빴던 녀석이 밥도 안 먹고 노는데 정신이 팔린 거랑 무엇이 다를까.. 살다 보니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더라.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삶.. 한 번 밖에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무슨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말을 잠들 때도 머리맡에 두고 지야 한다. 이번에는 꼰대 소리를 들어볼까..
공부하지 마시라. 제발 공부하지 마시라. 공부를 하면 할수록 당신의 아름다운 동심에 황칠을 하게 된다. 지울 수 없는 황칠이 당신의 감성을 깊이 잠들게 할 것이다. 아들 벌에 불과한 루이지는 그녀의 그림 수업 중에 늘 이와 같거나 비슷한 말을 한다. 그가 오히려 인생의 선배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는 아이들처럼 단순하게 마음을 비우고 가볍게 가볍게 시작하여.. 보다 세심하게 하는 작업은 마지막 단계라고 말한다. 대상을 그대로 베끼는 복사기가 되지 말고 대상을 이해하려 애쓰시라.. 그렇게 진행된 소묘 작품이 누드 소묘 외 어느덧 여덟 점이나 탄생했다. 불과 두 달만에 일어난 놀라운 사건이다.
Un ottimo record per una settimana della Disfida di Barletta
il 16 Dicembre 2021, La Disfida di Barletta in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