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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Dec 30. 2021

그 산이 나를 부른다

-그곳에 다시 서고 싶다


우리는 언제쯤 뒤를 돌아보게 될까..?!


       서기 2021년 12월 29일 저녁나절(현지시각), 우리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에서 파타고니아 여행을 끝마치고 오른 안데스의 쎄로 뽀초코의 사진첩을 열어보고 있다. 그곳에는 검게 그을린 얼굴의 한 사내가 스틱을 짚고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수많은 여행 사진 중에 하니가 찍어준 몇 안 되는 사진들 중에 담긴 내 모습이다. 그게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기고 있고 이틀 후면 햇수가 11년 혹은 12년에 들어설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내 곁을 지나간 10년의 세월.. 향후 10년의 세월도 그렇게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게 될까.. 


한 해의 끄트머리에서 열어본 사진첩을 앞에 두고 잠시 회상에 젖어들고 있다. 오래전 어느 때인가 우리에게 낯익은 최인호(崔仁浩, 작가) 선생이 티브이에 출연하여 "작가와 중국집 주방장은 얼굴을 안 보여주는 게 낫다"라며 말한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당신이 이렇게 말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사람들에게 꿈과 환상을 심어주던 사람이, 어느 날 불쑥 얼굴을 내밀어 당신의 정체를 밝힐 때 느끼는 상실감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실감.. (그 시절) 보이지 않거나 만날 수 없는 당신을 멘토로 삼고, 꿈을 키우며 환상에 젖었던 독자들이 화들짝 깨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중국집 주방장은 짜장면을 통해 요리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그런 당신들이 어느 날 모습을 드러냈을 때 생김새 때문에 크게 실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영화배우처럼 생겨야 할 작가 혹은 말쑥하게 요리사 옷을 차려입은 주방장이 생김새가 엉망(?)이거나 꾀죄죄하다면 차라리 나타나지 않는 게 더 낫다는 것이다. 



최 선생은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에 환상을 심어준 작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였다. 당신은 시나리오도 잘 썼지만 외모도 영화배우 같았다. 그런 그가 2013년 9월 25일 향년 67세의 일기로 세상을 등진 것이다. 우리가 파타고니아 여행을 끝마치고 귀국한 지 두 해만에 암(침샘암) 투병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그는 죽기 전에 당신이 연재하던 <샘터>에 보낸 글 '참말로 다시 일어나고 싶다'를 통해 요절한 김유정 작가가 죽기 열흘 전에 쓴 편지를 인용했다. 그는 그 편지를 읽을 때마다 펑펑 울었다고 고백했다. 당신의 고백은 이랬다. 


"갈 수만 있다면 가난이 릴케의 시처럼 위대한 장미꽃이 되는 불쌍한 가난뱅이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막다른 골목으로 돌아가서 김유정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고 싶다"


그는 위대한 천재 작가 김유정의 어떤 글(편지) 때문에 이런 고백을 했을까..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있다. 그리고 맹열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달리 도리를 차리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는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 원을 만들어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해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두어 권 보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역하여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주마. 하거든 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필승아.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하여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10여 마리 먹어 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쏘구리 돈을 잡아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 다오.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오. 기다리마.   


-3월 18일 김유정으로부터                                                       

                                                                                    


주지하다시피 김유정 작가는 지금의 춘천시 신남면 증리(김유정역)에서 태어나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신의 나이 겨우 29세였다. 일제강점기 때 태어난 그가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에 남긴 편지이다. 당장 돈이 필요했다. 살아나고 싶은 욕망이 더 넘칠 때도 없다. 최인호 선생이 어느 날 티브이에 출연하여 "작가와 중국집 주방장이 얼굴을 함부로 내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속은 얼마나 쓰렸을까..


하니와 나는 어느 날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중심에서 멀지 않은 안데스의 쎄로 뽀초코 정상 부근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파타고니아 여행을 통해 남긴 수많은 기록들 중에 우리의 표정이 담긴 사진은 많지 않다. 어떤 때는 무모할 정도로 목숨을 건 여행이라고 스스로 말했다. 뒤를 돌아볼 시간도 여유도 없이 그저 앞만 보며 나아갔다. 어쩌면 죽기 전에 내가 만나는 마지막 풍경이 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이 끼어들기도 했다. 좀 더 보자꾸나.. 다시 한 번 더 만나보자꾸나.. 그때마다 뷰파인더 앞에는 새로운 세상이 등장하곤 했다. 



최인호 선생이 꿈꾼 문학의 세계가 김유정 님을 통해 내 앞에 오롯이 드러났다. 가난에 찌들지 않으면 생명이 고귀해 보이지 않을 것이며, 행복 또한 허영으로 가득 찰 것인가.. 



물질이 차고 넘치는 시대에 들여다본 작가 혹은 요리사의 모습이 어느 날 거울 앞에 등장했다. 절박함이 묻어나지 않는 글과 풍요로움이 선생을 펑펑 울게 만들었을까..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것. 그러나 다시 그 산에 발을 들여놓을 수만 있다면, 감추어진 더 많은 신의 그림자인 아름다움을 여러분들과 공유하게 되지 않을까.. 그 산이 나를 부른다.


il Nostro viaggio in Sudamerica_Cerro Pochoco, Santiago CILE
Il 29 Dicembre 2021, La Disfida di Barletta in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우리는 언제쯤 뒤를 돌아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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