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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Feb 19. 2022

첫눈에 반한 그녀의 사진첩

-이탈리아서 맞이한 첫눈의 회상

서기 2020년 10월 7일(il 07 Dicembre 2020)의 기록 <하얀 비단결에 싸인 고갯길>에서..!


꼬르띠나 담빼쬬에서 빠쏘 디 지아우 고갯길을 천천히 올라가는 동안 하니는 아이폰에 자랑거리를 부지런히 담고 있었다. 그 기록들은 장차 아이들에게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보여줄 것이며, 자랑을 늘어놓을 때마다 돌로미티의 추억은 점점 더 커지며 하루라도 빨리 이탈리아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서 해산물 왕국이자 천국인 대한민국에서 이탈리아로 공수해 갈 품목을 하나둘씩 챙기고 있는 것이다.



- 우리 단골집 있잖아..

-응, 말해 봐..

-거기서 건어물 좀 사가는 게 어때..?

-좋긴 하지만 지난번처럼 많이 사 오면 곤란해..ㅜ

-우럭 황태 조기 말린 거.. 안 무겁거든..ㅎ

-암튼 무거운 가방 끌고 다니는 일 없도록 하셈..!!



우리가 첫눈에 대한 추억이 없었다면 어떤 대화를 이어갔을까.. 첫눈이 코로나를 덮어버린 그곳에 진눈깨비가 간간히 함박눈으로 변하고 있었다. 저 멀리 힘들게 올랐던 능선이 보이는 가운데 우리는 빠쏘 디 지아우 고개에 곧 도착하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다시 죽어도 잊지 못할 풍경을 가슴에 안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첫눈이 내린 빠쏘 디 지아우(Passo di Giau) 고갯길을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이곳은 지난여름 19박 20일 동안의 돌로미티 여행을 할 당시 마지막 코스였다. 첫눈이 오시던 날 하니와 내게 감동을 준 그곳을 다시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첫눈이 살랑대며 날리고 있는 고갯길은 여전한데 세상이 온통 하얀 비단결에 쌓인 듯 사뭇 다른 풍경을 선물해 주고 있는 것이다. 



조물주는 이런 풍경을 위해 빛의 마술사라 불리는 램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를 세상에 보냈을까.. 하니의 그림 선생님 루이지(LUIGI LANOTTE)는 바로크 시대를 산 램브란트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그의 초상을 팔뚝 한쪽에 문신을 두를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화풍은 램브란트를 닮았지만 자기만의 독특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었다. 



하니의 그림 수업을 동시통역하면서 빛과 어둠으로 표현되는 그의 작품에 적지 않은 감동을 받게 됐다. 그 결과 기초과정 4단계를 시작할 때까지 하니의 손끝은 미세한 주름 하나의 덩어리까지 잘 그려내며 일취월장(日就月將)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어느 날 이탈리아에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면서 도망치듯 그녀를 한국으로 떠나보내게 된 것이다. 나는 그걸 별리 여행이라 불렀다. 우리는 잠시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게 된 것이다. 



컴 앞에는 그녀가 남기고 간 까발레또(Cavalletto_이젤)는 물론 대여섯 점의 작품과 생활용품 다수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몸은 한국으로 떠났지만 그녀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또 사진첩 속에는 첫눈이 내리던 날의 추억까지 흠결 하나 없이 박제되어 있는 것. 



이틀 전 바를레타 시내 중심에 위치한 화방에 들러 액자 하나를 구입했다. 하니가 남긴 작품 한 점을 액자에 담아 걸어놓기 위함이었다. 까르본치노(Carboncino_목탄)로 그린 그림을 스프레이로 고정시킨 작품은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릴 때가 가장 행복했다"라고 말하곤 했다. 대상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그림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대략 3시간이 지나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 



최초 치비아나 골짜기(Il Passo Cibiana (1.530 m))에서부터 시작된 첫눈 여행은, 다시 빠쏘 치비아나 디 까도레(Passo cibiana di cadore)로 이어졌다. 그리고 아우론조 디 까도레(Auronzo di Cadore)를 따라 미수리나 호수(Lago Misurina)와 라고 단또르노(Lago d'Antorno)를 거쳐 꼬르띠나 담빼쬬(Cortina d'Ampezzo)까지 진출했다. (돌로미티를 여행하고자 하시는 분들은 지도를 펴 놓고 여정을 참고하시라고..)



그다음 우리의 목적지가 빠쏘 디 지아우(Passo di Giau(2 236 m))였으며, 그 고갯길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하니가 정밀 소묘를 하며 그림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으로 우리는 점점 더 첫눈 깊숙이 빠져드는 것이다. 아마도 램브란트가 이곳에 서 있었다면 인물 대신 하얀 비단결에 싸인 고갯길을 당신만의 화풍으로 잘 그려내지 않았을까.. 



아니면 루이지가 동행했다면 그 또한 흑백으로 변한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그려냈을지 상상이 간다. 르네상스를 거친 바로크 시대를 산 사람들은 그들 가슴에 묻어있는 예술혼을 따라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즐겼을 것이라 생각해 보는 것이다.



하니는 전화기 너머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하철을 타면, 출발하기 전에 운행 중에도 그리고 정차를 하면 '마스크 착용하세요'라고 말해..!"



하니가 그림 속으로 빠져든 것처럼, 어느 날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고갯길을 덮은 하얀 비단결처럼 코로나 이 녀석을 꼼짝달싹 못하게 덮어버렸으면 좋겠다는 거.. 지난여름에 다녀온 빠쏘 지아우의 고갯길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다시금 코로나를 잠시 잊게 된다. 세상을 하얗게 덮은 첫눈 때문이었으며,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집콕을 잊게 만드는 것이다.




    서기 2022년 2월 18일 저녁나절(현지시각), 어느덧 두 해 전에 기록해 둔 사진첩을 열어보니 그곳에 하니가 아이폰에 담아 저장해 둔 돌로미티의 첫눈 사진이 오롯이 남아있었다. 당시의 기록을 보니 코로나 투성이로 그녀는 코로나를 피해 한국에 가 있을 때였다. 이제나 저제나 코로나가 수구러들면 다시 이탈리아로 오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이탈리아로 돌아와 그림 수업을 재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소원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일주일에 세 차례 그림 수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짬짬이 바닷가로 산책을 나가는 등 겨울을 함께 보내고 있는 것. 돌이켜 보면 꿈같은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씩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비범했는지 스스로에게 되묻곤 했다. 



어쩌면 첫눈이 오실 때 강쥐처럼 날뛰던 일조차 그러할지도 모를 일이다. 허구한 날 눈이 펑펑 쏟아진다면 얼마나 지겨울까.. 그땐 아이들처럼 기뻐할 일이 아니라 저주의 대상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은 잊을만할 때 등장해야 반가운 법이다. 


이탈리아서 전혀 뜻밖에 맞이한 첫눈이 그랬다. 다시 생각해 봐도 그땐 왜 그렇게 강쥐처럼 날뛰었는지 모를 일이다. 첫눈.. 까이꺼 그게 다 뭐라고.. 그런데 그녀가 함께 나대며 찍어둔 첫눈을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그때 그 감동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것이다.



인간사.. 얼마나 간사한지 모른다. 똑같은 일이라도 어떤 땐 좋고 어떤 때는 별로거나 나쁘고.. 마음이 꼴리는 대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니 아이들처럼 투정을 부리는 거 있지.. 하니가 두 해 겨울을 한국에서 보내고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와 함께 지내는 지금.. 평범한 일상에 감사를 해야 마땅할 텐데 첫눈이 오시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려.. 그래도 되는 거양?!



똑같은 장소에서 그녀가 찍은 돌로미티의 첫눈 사진.. 



함께 즐겼던 첫눈 풍경인데 달라 보이는 건 무슨 조화인가.. 첫눈이 새삼스럽게 그리운 건 마음속에 찌든 코로나 후유증이었을까.. 세계인을 힘들게 했던 코로나 오미크론이 서서히 퇴장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대략 3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상처를 남긴 코로나 사태는, 유럽을 중심으로 집단면역 처방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조만간 유럽의 처방을 따라잡을 대책(민주당 이재명 대통령 후보 공약)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다. 반가운 소식이다. 그녀의 사진첩 속에서 첫눈이 오시던 날 감동이 되살아난 것도 코로나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il Nostro Viaggio in Italia_La prima neve sulle Dolomiti 2020
il 18 Febbraio 2022, La Disfida di Barletta in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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