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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Feb 22. 2022

아침햇살에 녹아든 엄마 생각

-10년 만에 잠에서 깨어난 파타고니아 여행 사진첩 #20

 

그땐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어..!!



    그 언덕 위에 서면 저만치 새하얀 눈을 머리에 인 장엄한 바위산이 보인다. 산기슭에는 침엽수림이 빼곡하다. 발아래로 습지가 보이고 그 곁으로 미루나무 숲이 빼곡하다. 이곳은 칠레의 파타고니아 지역에 위치한 꼬끄랑(Cochrane)이라는 작은 도시이다. 그냥 붙여진 이름 때문에 도시라고 부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도시의 형태와 전혀 다른 모습을 갖추고 있는 곳이랄까.. 



칠레의 남부 지역 까를로스 이바녜스 델 깜뽀 (Carlos Ibánz del Campo)에 위치한 이 도시의 면적은 약 8,500 km²이고 2017년에 조사한 인구수는 대략 3,500명에 이른다. 남녀 인구 비율은 남자가 더 많은 곳으로 여성 1,588명, 남성 1,902명으로 나타났다. 아래 첨부한 자료에 따르면 인구의 81.4%가 도시에 살고, 18.6%가 농촌에 살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파타고니아 여행 당시 만난 이 도시 중심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붐빌 때가 열댓 명이나 될까.. 버스 터미널 앞에는 주로 여행자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꼬끄랑의 중심에는 까페와 수퍼마켓도 있으며 잘 꾸며둔 공원도 있었다. 하지만 이 도시의 사람들 다수가 시골에 살고 있다는 점 등을 미루어 도시는 대체로 텅 빈 상태이다. 


지금 보고 있는 풍경은 도시 중심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언덕 위에서 바라본 풍경으로 발아래는 꼬끄랑 강(Rio Cochrane) 줄기가 흐르고 있다. 강의 발원지는 이곳에서 7km 정도 떨어진 라고 꼬끄랑(Lago Cochrane)이다. 리오 꼬끄랑의 본줄기로 흘러드는 작은 강이 흐르는 곳. 그곳에는 미루나무 숲이 빼곡했으며 팔뚝보다 더 큰 연어와 송어 등 물고기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서기 2022년 2월 22일 아침나절(현지 시각), 우리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에서 파타고니아 여행 사진첩을 열어보고 있다. 그곳에는 긴 여정으로 떠난 후 만난 파타고니아의 풍경이 오롯이 남아있었다. 사진첩을 열면 당시의 느낌은 물론 기억이 새록새록.. 



이날 나는 무엇에 이끌렸는지 하니를 숙소에 혼자 남겨두고 맑은 물이 철철 넘쳐흐르는 강가로 향했다. 그때 만난 풍경들이 유년기의 나를 소환하고 있는 것이다. 내 고향은 부산..


부산은 서면을 중심으로 중부님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몸씨도 가난했던 시절 어린아이 들의 놀이터는 시골과 다름없는 변두리로 동무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이다. 집에서 멀지 않은 산골짜기로 가면 그곳에는 맑은 물이 쉼 없이 흐르고 있었으며, 봄이 오시면 골짜기로 가는 길 언덕배기에 진달래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요즘은 쉽게 만날 수 없는 참으로 정겨운 풍경들..



그때 한 동네에 살던 아이들은 짬짬이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지경을 넓혀가고 있었다. 산골짜기의 풍광이 녀석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점점 더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랄까.. 어느 날 녀석들은 발칙한 작당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사전에 계획된 모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다 먼 곳으로 소풍을 가기로 작당을 한 것이다. 


말이 소풍이지 가난했던 시절 부모님 몰래 떠나는 여행에 지참한 건 달랑 주전자 하나.. 그 속에 마실 물이 든 게 전부였다. 서면에서 주례까지.. 다시 낙동강의 습지(당시만 해도 남아있었다)까지 걸으서 가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낙동강변에 도착하면 갈대숲이 무성했다.  솨악 솨악.. 갈대가 바람에 나부끼며 내는 소리 아래 개펄에는 조그만 게들이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우리가 강가에서 바라본 풍경은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가 택한 길은 '뽀뿌라마치' 혹은 '포프라 마찌' 등으로 불리던 감전동의 하천길.. 지금은 내가 너무도 듣기 싫어하는 언어가 미루나무길에 덕지 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일제가 만든 기생집들이 있었다는 곳. 당시 우리에게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술을 팔건 몸을 팔건 어린 녀석들의 호기심을 끌 리가 없었다. 

그 대신 주려 오는 허기를 채울 방법이 없는지 고심을 하며 집으로 털래털래 걸어가는 것이다. 서면으로 가는 길.. 이번에는 철로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만난 철로변 마을에 있는 한 우물.. 고사리 손에 매달리 두레박으로 끌어올린 우물물을 배 터지게 마셨다. 살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잠시 후 우리는 철길에 털썩 주저앉아 멀고도 먼 집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침햇살이 눈부실 때 집을 떠난 녀석들.. 김밥 한 줄도 없이 그 어떤 주전부리도 없이 마냥 호기심에 이끌려 떠났던 녀석들의 여행의 피로감이 철길 위에 퍼질러 있는 것이다. 그때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엄마에게 걱정을 끼쳐드린 건 녀석들 모두  다르지 않았다. 


오늘 아침 열어본 파타고니아 여행 사진첩 속의 파타고니아의 한 마을.. 그곳에 아침햇살에 녹아든 엄마 생각이 오롯이 묻어났다. 천신만고 끝에 집으로 도착한 녀석들.. 다른 녀석들은 어땠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에구 녀석아 어디로 그렇게 싸돌아 다녔니.. 어서 닦고 밥이나 먹어"라고 말씀하셨지.. 해가 뉘엿거리고 있었다. 그때 녀석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기찻길 옆에서 퍼마신 우물물보다 더 많이 쏟아진다. 그리고 지가 잘못해 놓고 서러운 소리를 내며 꺼이꺼이 목 놓아 운다. 파타고니아 여행 사진첩이 소환한 오래된 풍경이다.


il Nostro viaggio in Sudamerica con mia Moglie_Cochrane CILE
il 22 Febbraio 2022, La Disfida di Barletta in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Cochrane (Cile)


Cochrane es una ciudad y comuna chilena, capital de la Provincia Capitán Prat, en la Región de Aysén del General Carlos Ibáñez del Campo, en la zona austral de Chile. Tiene una superficie aproximada de 8500 km²  y una población estimada de 3.490 habitantes (1.588 mujeres y 1.902 varones), la cual representa el 3% de la población regional. Según datos del censo 2017, 81,4% de la población vive en la ciudad y 18,6% en el área rural.


Historia

La comuna fue creada en 1927 con el nombre de Río Baker y abarcaba toda la extensión de la actual provincia Capitán Prat. En 1929, cuando el pueblo estaba en el sector Las Latas, el intendente Marchant creó una comisión de tierras para definir su trazado. El agrimensor Eleodoro Barrientos trabajó en esa tarea. Dicho traslado llevó a cabo al lugar del Pueblo Nuevo, denominado así por estar en formación. Este, se ubicaba en el valle del río Cochrane, ubicado geográficamente a 7km del lago Cochrane.

El pueblo de Cochrane fue inaugurado oficialmente el 17 de marzo de 1954, cuando se terminó una casa destinada a correos, que luego fue concedida a la Fuerza Aérea de Chile. El sitio de dicha casa fue donado por Luis Báez Barra, entonces subdelegado de Cochrane. Los adobes y las tejuelas fueron hechas por Enrique Barría y Zenobio Mansilla respectivamente. El pueblo contaba en aquel entonces con diez cas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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