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아내와 함께한 여행 사진첩
내게 친절을 베푼 버스 운전사와 하늘에 감사드린다..!
낯선 도시에서 겪은 끔찍한 경험
우리는 필요 이상의 시간을 꼬자이께(Coyhaique)에서 보냈다. 꼬자이께는 우리에게 벅찬 감동을 준 파타고니아 중부의 아름다운 도시였다. 이 도시를 처음 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언덕 위에 서면 마치 장난감처럼 아기자기하게 보였다. 커다란 암반 위에 건설된 도시의 좌우로 두 개의 강이 흐르고 뒤로는 산이 병풍처럼 드리워졌는데 우리는 그곳에서 한 달 정도 머물게 됐다.
도시를 감싸고도는 리오 심프슨(Rio Simpson) 강과 주변은 볼거리가 가득 널린 천국 같은 도시였지만, 당시 내게는 '그림의 떡'처럼 여겨진 곳이기도 했다. 나는 숙소 바깥을 나갈 수가 없었다. 허리와 고관절에 극심한 통증이 온 것. 이때부터 아내는 나의 간호에 매달렸다. 지인의 안내로 병원에 가 봤지만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대로 주저앉고 말 것인가..)
우리는 파타고니아 투어를 대략 1년 정도 계획하고 떠났는데 이제 본격적인 투어가 시작되는 찰나에 내 몸에 이상 신호가 온 것이다. 아내는 매일 저녁 핫팩으로 환부를 데웠다. 하지만 전혀 차도가 없었다. 아내의 얼굴에 답답함이 가득해 보였다. 나는 나대로 걱정이 태산 같았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이곳에서부터 한국까지 가는 과정이 여간 만만하지 않았다. 몸을 몇 걸음만 떼도 뼛속은 바늘로 찔러대는 것처럼 나를 자지러지게 했다. 당시 우리는 숙소의 2층에 머물렀는데 식당과 거실이 있는 아래층까지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오는 시간이 5분은 더 걸린 듯했다. 난간을 붙들고 한 걸음씩 아래층으로 이동하는 것. 그러다가 비명을 지르곤 했다.
내가 체험한 기적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결심을 했다. 여기서 죽던지 살던지 단판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마음을 그렇게 먹으니 통증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매일 숙소 주변을 매우 천천히 걸었다. 10미터, 50미터, 100미터씩 거리를 늘려간 것이다. 죽을 맛이었다. 아마도 이런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엄살처럼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차마 믿기지 않는,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
숙소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시립 공동묘지까지 걸어서 간 것이다. 대략 300미터 정도 되는 그곳은 리오 꼬자이께(Rio Cohaique)강이 흐르는 곳으로 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그곳은 현지인들이 초초(ChoCho_Lupinus)라 부르는 꽃들이 무리 지어 만발해 일대 장관을 이루는 곳이었다.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으려면 공원묘지 안을 지나쳐야 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글쎄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주제에 사진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희끗해진 아내의 머리카락.. 우리네 삶은 제아무리 포장을 잘 해도 속일 수 없는 게 있다. 나이가 그것..!
나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생전 듣보잡이었던 풍경에 매료되어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두지 알 수 없을 정도라면 믿기시는가. 숙소로부터 한 발짝씩 이동한 나는 마침내 공원묘지 입구에 도착했다. 그리고 묘지 안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떼는데 나의 정면에 예수가 피를 흘리며 십자가에 매달려있었다. 제법 큰 조형물은 실물 크기보다 조금 더 컸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그 모습을 계속 바라보면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걸음은 속도가 붙었고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걷고 있었던 것이다. 놀라운 일이자 기적 같은 일이 내 몸에 일어났던 것이다.
아마도 브런치에 끼적거린 나의 경험을 보시는 분들 중에는 마치 광신적 개신교인들의 간증처럼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건 사실이다. 나는 그때부터 신이나 발을 동동 굴려보기도 하고 빠르게 걸어보기도 했다.
"세상에..이런 일이..!!"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통증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나는 그 즉시 숙소로 빠르게 걸어서 이 같은 사실을 낱낱이 다 일렀다. 아내가 뛸듯 기뻐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알게 된 지인들도 함께 기뻐했다. 그리고 가끔 나의 친구 뚫리오와 마리아가 우리를 자동차에 태워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었다. 또 나는 환부가 치료되기만 하면 이곳에서 꼭 가 보고 싶었던 장소가 있었다. 나는 이때부터 이 도시를 떠날 때까지 비경들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요ㅜ)
아내는 환부가 재발될까 봐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지독한 통증을 경험한 나는 그때부터 '도 아니면 모'식이었다. (아플 테면 아플 테라지 뭐..) 희한한 배짱까지 생긴 것이다. 한 달은 대략 이렇게 훌쩍 지나갔지만 1년의 세월을 보낸 듯했다. 그동안 파타고니아의 봄은 점점 더 남하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도시에 머물 이유가 없어서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남부 파타고니아로 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정말 꿈같은 일이었다. 그 먼 곳까지 발도장을 찍으며 우리는 다시 일정에 따라 여행에 나섰다. 나를 힘들게도 했지만 정든 도시 꼬자이께를 떠나던 날 우리는 작은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운전기사님이 배푼 친철
꼬자이께에서 뿌에르또 인제니에로 이바녜스(Puerto Ingeniero Ibáñez)까지 이어지는 여정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라고 헤네랄 까르레라(Lagp general carrera)를 건너 칠레 치코(Chil chico)까지 갈 요량이었다.
나는 여행중 습관처럼 버스에 올라타면 맨 앞자리를 선호한다. 이같은 습관은 표를 예매할 때부터 시작된다.
버스 앞자리에 앉으면 시야가 확보되고 새로운 풍경들이 차창 밖으로 지나칠 때, 그 장면들을 놓칠세라 카메라에 담는 것. 이런 모습은 마치 초등학생들이 세상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누가 뭐래도 나는 그게 좋은 것. 버스 운전기사님은 이런 나를 신기하게 생각했던지 아니면 당신의 나라 풍경에 매료된 한 동양인이 마음에 쏙 들었던지 이때부터 대화가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한국에서 온 여행자로 지금 칠레 치코로 떠나기 위해서 버스를 탔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나의 눈은 주로 창밖의 풍경에 고정돼 있었다. 그런데 버스기사가 흥미로운 제안을 나에게 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전망이 기막히게 좋은 장소가 있으니 그곳에서 잠시 쉬었다 갑시다"
잠시 후 버스가 멈춘 곳은 뿌에르또 인제니에로 이바녜스 포구가 빤히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었다. 승객들은 멋도 모르고 차에서 내려 바람을 쐬는 동안 나의 뷰파인더는 바쁘게 움직였다. 버스기사는 그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우리나라에 이런 풍경도 있어요'라며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
그런데 풍경은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웠지만 무시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도무지 눈을 뜰 수 조차 없을 정도였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그곳엔 방풍림으로 심어둔 미루나무들이 빼곡했는데 바람이 얼마나 심했으면 거의 대부분의 나무들이 한쪽으로 휘어져 있었다.
아내와 나는 이곳에서 흔치 않은 기록을 남겼다.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호수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게 된 것이다. 행운이었다. 이 같은 일은 버스기사의 배려가 없었다면 그냥 지나칠 뻔한 일이었다. 사진첩을 열어 당시를 회상 하니 그야말로 꿈만 같다. 파타고니아 투어가 끝날 때까지 무탈하게 건강한 모습으로 귀국한 것이다. 하늘에 감사하며 버스기사님께 감사드린다.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에서 쓰다.
LA NOSTRA VIAGGIO SUDAMERICA
Puerto Ingeniero Ibáñez Patagonia CILE
Foto di yookeun Chang_Geograf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