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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May 15. 2023

우도, 스승의 날에 돌아본 참 스승

-환상의 섬 우도 긴 잠에서 깨어나다


어미만 한 스승이 또 있을까..?!!



어머니 마음

-양주동 작시, 이흥렬 곡


낳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 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마음 

앓을사 그릇될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사람의 마음속엔 온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이 땅에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없어라





   서기 2023년 5월 14일 오후(현지시각), 우리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서 우도 여행 풍경을 열어보고 있다. 그곳에는 어머니를 떠올리게 만드는 찔레꽃이 소담스럽게 피어있다. 어머니를 영원히 이 땅에서 떠나보내실 때 묘지가 바라보이는 골짜기를 하얗게 수놓았던 꽃.. 유독 꽃을 사랑하셨던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새하얀 찔레꽃이 떠오른다.



우도 여행 풍경을 천천히 살피며 한 때 어버이날에 목놓아 부르는 '어머님 마음'을 듣고 있자니 눈시울이 절로 뜨거워진다. 참 오랜만에 들어본 노래와 노랫말.. 그곳에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어머니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다.  


어머니 마음은 일제 강점기 때(1930년대) 작곡된 우리나라의 가곡으로 문학박사 양주동(梁柱東) 선생의 시에 감동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이흥렬(李興烈선생이 곡을 지었다. 한 분은 1977년에 또 한 분은 1980년에 작고하셨는데 그분들이 남긴 유작들로 후세들이 어머니 마음을 조금은 더 깨닫게 되었다고나 할까.. 



우도, 스승의 날에 돌아본 참 스승

-환상의 섬 우도 긴 잠에서 깨어나다



어느 날 우도 여행 중에 만난 어미 소 한 마리와 송아지 두 마리가 찔레꽃 덤불너머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어미 소는 낯선 이방인의 출현에 풀을 뜯다 말고 경계모드로 돌입했다. 곁에 있던 송아지 두 마리의 표정도 어미를 닮았다.


새까 한 마리도 낳기 어려울 텐데 어미는 운 좋게도 두 마리를 낳았다. 농부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도 없을 것.



찔레꽃 덤불과 어미 소와 송아지.. 대도시에서 흔히 만날 수 없는 풍경 속에서 어미의 마음을 읽는다.



사람의 마음속엔 온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이 땅에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없어라



우리가 알고 있는 소의 삶은 인간을 풍요롭게 만들 뿐만 아니라 온순하며 우직하다. 농경사회에서는 인간과 함께 삶의 무게를 서로 나누고 살았던 참 친근한 가축.. 소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농업이 시작된 이래로 수백 수천년 간 이어진 농사일 대부분을 도맡아 했다. 그리고 사후에는 귀한 식재료로 인간을 위해 머리와 꼬리까지 그거도 모자라 가죽까지 모조리 인간을 위해 제공됐다. 이런 소의 삶 때문에 새끼를 낳으면 사람과 같이 금줄을 쳐주고, 봄이 오시면 외양간을 가장 먼저 치워주었다. 먼 길을 떠날 때는 소의 발굽을 보호하기 위해 짚으로 만든 신발(짚신)도 신겼다. 소는 우리 인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소가 어느 날 우도 여행에서 내 앞에 찔레꽃과 함께 등장한 것이다.  보면 볼수록 착하고 순해 보이는 어미 소의 표정에 어머니 마음이 묻어나며 다시 찾아온 '스승의 날'까지 겹쳐 보이는 것이랄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바를레타까지 이어지는 여정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이탈리아 요리에 입문하기 전에 맨 먼저 거쳐야 할 '통과의례'가 있었다. 이탈리아 요리뿐만 아니라 디자인이나 패션 성악과 건축 등 내로라하는 이탈리아의 자랑거리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언어 습득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 과정을 관련 포스트에 언급한 적 있다. 그때 이렇게 기록했다.



이탈리아어를 배우게 된 동기


나를 낳아준 어머니와 내 조국.. 다른 건 몰라도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운명이 어머니와 조국이다. 나는 이탈리아에 둥지를 틀기 전 내가 태어난 조국에 대해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혹은 잘 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전투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하던지, 금수저로 태어나던지, 그것도 아니면 정치검사나 법관이 되는 일이다. 이른바 상류 3~5%에 해당되어야 떵떵거리고 살아갈 것이다.


설령 떵떵거리고 살아간다 해도 대한민국에서 겪어야 하는 정치적 현실은 가혹했다. 여전히 적폐 세력들이 설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어디를 둘러봐도 부조리 투성이다. 언론은 정론직필을 상실한 지 꽤 오래되었다. 여전히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 우리는 물론 선조님들이 주로 그런 환경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렇다면 나도 그분들처럼 살다가 생을 마감할 것인가.



이게 나 스스로에 대한 동기부여였으며 반드시 이루어야 할 목표였다. 어떤 사람들은 동기부여를 "이탈리아에서 한 달만 살고 싶어"라고 말하거나 꼬드긴다. 미리 말하지만 몰라도 한참 모르거나 상대를 기망하여 이익을 도모하려는 자이다. 당신이 특정 지역에서 한 달을 살고 싶어서 최소한 1년 이상의 시간을 언어 습득에 투자할 수 있겠는가.. 

그건 바보 같은 짓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200% 실패를 한 사람들이다. 실패는 고사하고 자라 보고 놀란 가슴으로 다시는 이탈리아를 보지 않게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탈리아 요리학교의 졸업장(간판)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한국 사회가 만든 병폐가 나타난 것이다. 200% 실패를 한 사람들이다. 



(중략)..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면서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외대를 나온 사람도 있고 건축을 전공한 사람 성악을 전공한 사람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 등이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언어 때문에 고민한 사람들이었다. 한국에서 한국말로 배우는 이탈리아어도 힘이 든데, 이탈리아어를 이탈리아어로 배운다는 게 쉬운 일인가. 


그들은 이탈리아어를 전공하면서 어느덧 10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청춘을 언어 공부에 시간 다 보내고 보니 대학 졸업자의 나이가 30줄에 접어들었다. 어떤 분은 이탈리아어에 투자한 시간이 너무 길어서 결국 결혼까지 포기한 사람도 봤다. 당신이 그토록 꿈에 그리던 아름다운 나라가 지옥처럼 변하고 결국 보따리를 싸고 고향 앞으로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탈리아어 공부 어떻게 할 것인가.. 동기부여가 확실하다면, 한국에 사는 게 지겨워 죽을 지경이라면, 경우의 수 하나를 잘 봐 두시기 바란다.



이탈리아어 이렇게 공부했다


인생 후반전을 살고 있었던 내게 시간은 많지 않았다. 교대 앞에 위치한 한 어학원에 등록한 즉시 강행군에 들어갔다. 하루 24시간을 쪼개고 또 쪼갰다. 언어를 전공한 내가 아는 것은 은사님이 가르쳐 주신 언어 습득 방법이 전부였다. 언어는 습관이라고 말한다. 문법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내 입에서는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빠를라 빠를라.. 주절주절 중얼중얼.. 


아침에 일어나는 즉시 강남의 집에서 가까운 산으로 운동 겸 언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초소형 녹음기에 녹음된 장문의 이탈리아어를 통째로 외우기도 하고 동사 형용사 등을 큰 소리 내어 외우고 또 외웠다. 은사님께서는 "발음이 어렵거니 말이 잘 안 될 때는 한 단어를 천 번씩 외우라"라고 말씀하셨다. 문법을 배우면서 내게 닥친 난제는 어휘를 늘리는 것이었다. 매일 20 단어씩 5천 단어를 외우는 게 목표였다. (이게 가능할까..? ㅜ)


만약 내가 청춘일 때 이렇게 공부했으면, 외국어대학 교수가 되었거나 외교관 등 관련 분야에 두각을 나타냈을 게 분명하다.(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런 일이 지속되자 생긴 일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세수를 하면 코피를 쏟는 것이다. 매일 아침 코를 틀어막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몸무게가10kg이나 빠졌다)집에서 전철을 타고 어학원에 갈 때도 전철 속에서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흘깃거렸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가까운 공원에 들렀다. 공원에서 웅변하듯 큰소리로 떠들어대며 외우고 또 외우고..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책상에 앉아 예습과 복습에 열중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잠자리에 들면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잠자리에 들었다. 피곤에 곯아떨어진 어떤 때는 꿈속에서 조차 중얼중얼.. 문장이 훤히 보이는 기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략)



이때 내가 다녔던 어학원의 선생님이 내게 큰 도움을 주셨다. 그분은 성악을 전공하고 이탈리아 베네찌아서 살다가 어느 날 원장 선생님을 만나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분의 이름은 모니카(MONICA).. 나의 이름은 프란체스코(FRANCESCO).. 나를 감동의 도가니 속으로 빠뜨린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를 생각하며 작명을 했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는 학생들 전부 이탈리아 이름으로 임시 개명한 것이며 이탈리아서도 사용하게 된 이름이다. 


문법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매일 아침 숙제를 검사하는데 모니카 선생님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숙제검사를 했다. 당시 학생들은 딸 아들 벌이어서 질문에 허둥대면 창피한 생각도 들었다. 그때 내 앞에서 근엄한 표정으로 숙제를 캐묻던 모니카 선생님은 어느 날 이렇게 말씀하셨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코는 반드시 해내고야 말 겁니다."



서두에 잠시 살펴본 어머니 마음과 죽어서까지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 희생하는 소의 삶을 소환한 배경에는 참 스승의 말씀 하나가 있었다. 자칫 포기할 수도 있는 힘든 통과의례를 거뜬히 견딜 수 있게 만들어준 동기부여가 없었다면 지금 이탈리아서 살아갈 수 있었을까.. 모니카 선생님은 손 아래지만 수업시간만큼은 손윗사람이나 어머니처럼 학생들을 대했다. 그리고 수강을 하는 동안 허물없이 친하게 지냈다. 



세상에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생님들 중에 우리가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분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말에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 않는다'는 명언이 있다. 존경의 의미가 담긴 말이다. 역설적으로는 스승의 그림자를 밟고 청출어람(靑出於藍)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스승의 날에 모니카 선생님을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누군가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가르침과 응원의 메시지는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을 것이다.


Un ricordo indimenticabile di un viaggio_ISOLA U-DO
Il 15 Maggio 2023, La Disfida di Barletta in ITA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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