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가 꿈꾸는 그곳 May 22. 2023

시에나, 묵은지 닮은 중세 속으로

-SIENA, 중세의 시간이 멈춘 도시


르네상스의 고도 피렌체와 전혀 맛이 다른 시에나 속으로..?!!



   서기 2023년 5월 22일 저녁나절(현지시각), 우리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서 중세의 고도 시에나 여행기록을 들추어보고 있다.  지금 내 앞에는 중세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인쇄해 팔고 있는 가게가 있다. 이때 담은 두 점의 적품이 곧 등장한다. 요즘 화풍과 매우 다른 그림 속에는 화려하고 귀품이 넘치는 풍경과 함께 당시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이 눈에 띈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일러두기'를 참조하면 시에나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미리 일러두기


로마 신화에 따르면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두 명의 쌍둥이 형제이며, 그중 한 명은 로마시의 설립자이자 첫 번째 왕이었다. 설립일은  기원전 753년 4월 21일로 기록되어 있으며, 잔설에 따르면 이들은 아네아스(Enea)의 자손인 레아 실비아(Rea Silvia)와 화성의 자손이었다. 고대 로마의 위대한 정치가이자 장군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Quintus Fabius Maximus_Quinto Fabio Massimo Verrucoso)의 설에 따른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 아에네아스(Aeneas)의 후손은 로마의 남동쪽에 위치한 알바 롱가(Alba longa)라는 지역에 정착하여 살았다. 누미또레(Numitore)와 아물리우스 (Amulius)라는 형제는 씨족의 상속권을 놓고 다툼을 벌였다.

동생인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의 장자권을 무시하고 무력을 써서 씨족의 우두머리가 된 후, 심지어 형의 딸내미 레아 실비아(Rhea Sivia, 혹은 일리아 Ilia) 베스타 신전(tempio di vesta Roma)의 제사장으로 삼아 결혼을 못하게 함으로써 누미토르의 가계의 씨를 말리려고 했다. 신전의 제사장은 성직자라는 종교적 위치 덕분에 사회에서는 존경받았지만, 평생 동정과 신전의 불을 지킬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로물로스와 레무스는 빨라티노(Palatino) 언덕에서 늑대에게 길러졌다고 전해진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를 시작으로 로마황제들이 여기에서 살기를 좋아했으며 그 궁전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가축을 치는 시종 파우스툴루스(돼지치기)는 갓난아이들을 제거하라는 아물리우스의 명에 따라 쌍둥이를 바구니에 담아 테베레(Tevere) 강에 띄워 보냈다. 



한편 비탄에 잠긴 실비아는 테베레 강에 투신자살 하였다고 한다. 아이들을 실은 바구니는 얼마 후 강가로 떠밀려가 멈추어 섰다. 때마침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늑대 어미는 칭얼거리는 아이들에게 젖을 물렸으며, 그리고 딱따구리가 다른 먹을 것을 날아 주었다고 한다. 



이런 전설이 믿기시나 모르겠다. 그렇지만 당시 로마인들은 여러 전설들 가운데 이 전설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고 전하며 실제로 오늘날 로마의 중심은 빨라티노 언덕이 중심이 되고 있다. 바로 곁에 꼴로세오(Colosseo, 콜로세움)가 지어져 오늘날까지 로마를 기억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지난 여정 <시에나, 살아 숨 쉬는 중세의 화석> 편에서 이렇게 쌌다. 시에나 중심에 다다르면 곳곳에 전설의 상징 로물로스와 레무스 그리고 늑대가 눈에 띈다.



시에나, 묵은지 닮은 중세 속으로

-SIENA, 중세의 시간이 멈춘 도시



우리는 조금 전 시에나의 중심 깜뽀 광장 (Piazza del Campo)을 돌아보고 걸음을 옮겼다. 



시에나의 명소이자 유명한 광장이다. 이 광장의 둘레는 333m이고 우뚝 솟아있는 탑 또르레 델 만지아(Palazzo Pubblico e la Torre del Mangia)은 벽돌로 지어진 것으로 높이는 88m에 이른다. 중세의 리뽀 멤미(Lippo Memmi)가 디자인하고  뻬루지니 무치오(perugini Muccio)가 지었다.



우리가 걸음을 옮기 곳은 시에나의 중심이며 골목길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르네상스의 고도 피렌체서 만나지 못한 중세의 오래된 도시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중세시대와 바로크 시대가 얼기설기 얽힌 도시.. 그 가운데 빨라쪼 끼지-사라치니(PALAZZO CHIGI IN ARICCIA)가 눈에 띈다.



PALAZZO CHIGI IN ARICCIA


Il palazzo ducale di Ariccia (Roma) è un esempio unico di dimora barocca rimasta inalterata nel suo contesto architettonico, urbanistico e paesaggistico. Una vera capsula del tempo che conserva miracolosamente, oltre all’armonia ambientale, anche l’arredamento, la funzione e la disposizione originaria delle sale. La sua visita è un viaggio a ritroso nel tempo, che ci catapulta nel passato della grande aristocrazia europea attraverso la storia di una dei più illustri casate italiane, i principi Chigi.


Unitario e armonioso nel suo aspetto esteriore, è il risultato di una radicale ristrutturazione che trasformò nel XVII secolo il severo castello Savelli in una fastosa dimora barocca. L’intervento si inserisce nel contesto dell’adeguamento urbanistico e architettonico di Ariccia promosso dai Chigi e dal loro congiunto, papa Alessandro VII (1655-67), sotto la direzione del Bernini. Infatti la casata senese acquistò nel 1661 dai Savelli il feudo sui Colli Albani per la vicinanza a Castel Gandolfo, scelto dal papa come sede delle villeggiature pontificie.


아리치아(Ariccia (Roma)에 위치한 두깔레 궁전은 바로크 시대에 지어졌으며 독특한 건축물로 소개되었다. 당시를 엿볼 수 있는 진정한 타임캡슐로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장식과 기능 등이 기적처럼 보관된 곳. (중략).. 사실, 1661년 시에나의 집은 카스텔 간돌포와 가깝기 때문에 알바니 언덕의 불화를 세이블리에서 구입했으며, 교황에 뜻에 따라 교황의 여름 휴양지로 선정되었다. (번역: 역자 주)



IL PONTIFEX


IL COSTRUTTORE DI PONTI


Il pontefice era un sacerdote della Religione romana. L'etimologia della parola pontifex (pontem facere) significa "costruttore di ponti", è erroneamente attribuito al fatto che in Grecia ci fossero i sacerdoti gephyraei, con lo stesso significato di "costruttore di ponti". Il che deriverebbe dal fatto che in Tessaglia le immagini degli Dei venissero poste sopra il ponte sul fiume Peneus. I gephyraei erano una famiglia, forse un clan, e non una casta.


Inoltre i sacerdoti greci adoravano Dei sul ponte, non costruivano ponti. Viceversa l'arte di costruire ponti, i Romani l'appresero dagli Etruschi.


Il Pontifex era l'artefice di ponti, colui che sa costruire i ponti, attraverso incastellazioni di legno su cui si ponevano le pietre rastremate e infine il cuneo centrale. Il legno, curvato a caldo e opportunamente legato, veniva posto in loco dove si doveva montare l'arco, e sopra questo si ponevano le pietre leggermente rastremate con il lato più stretto verso il suolo. Infine una pietra più grossa e più rastremata delle altre, detta cuneo, si poneva sul culmine dell'arco, ora il tutto si teneva per forza di gravità che scaricava sui pilastri laterali, e il legno veniva tolto.


위 자료사진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로마 종교의 교황이었다. 그는 다리 건설업자 출신으로 일 뽄떼퓌체(Il pontefice)라는 단어의 어원은 '다리 건설자'를 의미한다. (중략).. 거기에 그리스 사제들은 다리 위에 있는 신들을 숭배했으며 그들은 다리를 건설하지 않았다. 반대로 다리를 건설하는 기술은 로마인들에게서 배워야 했다. (번역: 역자 주).



우리는 이곳에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오래된 우물을 만날 수 있었다. 



바로크 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우물은 세월의 무게를 충분히 견디며 우리 앞에 등장했다.



재밌는 사실은 이 우물의 위치가 시에나 중심이자 산꼭대기(높은 언덕)에 시설된 것이다. 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지형에 시설된 우물을 보는 순간 묵은지 향기가 마구 샘솟는 게 아닌가.. 참고로 자료를 링크해 두었다. 짬짬이 번역을 해 볼 작정이다.


MICAT IN VERTICE


PALAZZO CHIGI SARACINI


La storia di Palazzo Chigi Saracini inizia nella metà del Duecento, con il primo nucleo costituito da una torre edificata dalla famiglia Marescotti, dalle cui finestre i governanti senesi appresero della storica vittoria della battaglia di Montaperti.


Ai primi del Cinquecento il Palazzo fu acquistato dai Piccolomini del Mandolo. A loro si devono le decorazioni in stile raffaellesco del loggiato esterno, i fregi istoriati e alcuni affreschi ancora visibili in alcune stanze. 


Nel 1770 il Palazzo fu acquistato dalla famiglia Saracini che lo ampliò, portandolo alla forma attuale. Galgano Saracini vi mise a dimora una grande collezione di capolavori artistici, che fu aperta al pubblico nel 1806 e diventò in breve tempo un vero e proprio Museo Privato. Un antico pozzo fu collocato al centro del cortile, su cui si affaccia la Cappella dedicata a San Galgano. 



곁에 있던 하니가 말했다.


"이 친구들은 뭘 만들어도 건성건성하는 법이 없어. 손만 대면 작품으로 등장하는 게 신기해!"



지명이 위치한 홈피(MICAT IN VERTICE)를 열어보니 음악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하니와 함께 우물가를 서성이며 감탄해 마지않은 역사적 유물 앞에서 묵은지를 생각해 낸 것도 재밌는 일아다. 우리나라의 김치 가운데 막 지은 겉절이 김치와 김장김치 그리고 묵은지의 맛은 서로 다르다. 그중 묵은지의 깊은 맛은 겉절이와 갓 담은 김장김치와 너무 다르다. 특히 묵은지로 찌개를 만들면 한 입에 반한다고나 할까..


우리는 죽기 전에 미켈란젤로의 도시 피렌체서 딱 한 번만 살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피렌체는 스토리텔링이 풍부한 곳이어서 아무 데나 손을 대면 이야기보따리가 와르르 쏟아지는 곳이다.



반면에 오늘날 피렌체에 남아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유물은 물론 도시는 대부분 사리지고 있으며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아가야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시에나는 달랐다.



시에나는 도시 전체가 중세와 바로크 시대의 유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피렌체 공국이 시에나 공국을 탐낸 주요인이 시에나 중심에 버젓이 남아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찾는 피렌체로 여행을 떠나면 시에나 일정을 꼭 추가해 주기를 바란다.



그다음 일정을 잘 조율해서 천천히 하루 종일 구석구석을 잘 살피면 묵은지 향기가 폴폴 나게 될 개 분명하다.



시에나 중심서 만난 현대의 미술품과 조형물도 독특한 화풍과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인다.



뷰파인더가 작동하는 곳은 전에 만나지 못했거나 반드시 기록을 해 두어야겠다는 생각들이 미친 곳이다.



시에나 중심의 오래된 골목길을 걷고 있노라면 시간이 박제된 듯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듯하다.



우리는 다시 13세기 때 지어진 시에나 두오모 대성당(Duomo di Siena)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다. 이곳에서는 또 어떤 이야기가 쏟아질지 벌써부터 설렌다. <계속>


Fossile medievale che respira_Siena, Toscana in ITALIA
Il 21 Maggio 2023, La Disfida di Barletta in ITA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