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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Feb 08. 2020

귀밝이술에 취한 조카

-정월 대보름과 나의 어머니 

하마터면 잊고 지나칠 뻔했다..!!



아침운동을 끝마치고 나면 습관처럼 들르는 곳이 있다. 그곳은 바닷가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작은 언덕 위에 대형마트가 있는 곳이다. 웬만하면 냉장고에 음식을 보관하지 않으므로 발품만 조금 팔면 신선한 식품들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이다. 바닷가로부터 이어지는 동선은 나지막한 언덕으로 이어지는데 그곳에 콘크리트로 만든 구조물(축대)이 쌓여있었다. 구조물 앞에는 좁은 틈이 있었다. 그곳에 샛노란 풀꽃이 피어있었던 것이다. 


위 자료사진은 아침운동에서 만나는 방파제 입구에 피어난 풀꽃.. 뒤편으로 바를레타 성이 자리잡고 내가 사는 곳은 좌측 뒷편 시내 중심에 있다.


풀꽃 뒤의 구조물에는 동그란 홈이 파여 있었다. 절묘한 조화였다. 동그랗게 팬 홈이 잠시 잊고 살던 정월 대보름의 둥근달을 떠올린 것이다. 100미터 정도 이어지는 구조물 앞에 이 같은 풍경이 몇 번 이어졌다.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으며 오래전 정월 대보름 날의 추억을 건지게 된 것이다. 하마터면 잊고 지나칠 뻔한 추억들을 일깨워 준 고마운 풍경들..





종가의 맏며느리였던 어머니께선 연중 바쁘셨다. 명절은 기본.. 잊을만하면 제사가 찾아오는 것이다. 하얀 저고리와 까만 치마.. 하얀 머릿수건과 앞치마는 어머니의 상징과 다름없었다. 그런 어머니께서 정월 대보름이나 제삿날이 다가오면 무척이나 분주하셨다. 차례상에 올리거나 귀밝이술을 빚기 위해 큼지막한 항아리를 장독대에서 날아와 깨끗이 씻은 다음 청주 담그기 준비를 하는 것이다. 


어릴 적 이 같은 어머님의 모습은 의례히 해야 하는 당연한 일인 줄 알았다. 늘 봐 왔던 모습이라 더 그랬던 것 같았다. 그런데 철이 들고나서부터 그런 생각은 아픔으로 다가왔다.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시려오는 것. 어머니가 너무 힘드셨던 것이다. 종갓집이 아니라 할아비라 할지라도 세시 풍습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것이다. 





어머니는 정성을 다하셨다. 맑은술 청주를 빚기 위해 지성을 드리는 한편 고두밥을 지어 볕에 적당히 말리고 누룩과 잘 섞어 항아리에 담는 것이다. 그 항아리는 큰방 아랫목을 차지하고 담요를 둘렀다. 장작으로 데운 온돌방은 아침이면 식었는데 아랫목 술항아리 근처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날이 밝아오면 건넌방에서 잠을 자던 우리 형제들이 일제히 모여드는 곳이 술항아리 근처였다. 그때부터 아우성이 펼쳐지며 난리를 치는 형제들.. 서로 따뜻한 아랫목을 차지하기 위해 이불 밑에서 발길질을 하다가 한 녀석이(주로 동생이나 나..^^) 찌질 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때 부엌에서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온다.


"또 눈 떴다!!"





그런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정월 대보름 날에 형제들 전부가 한 자리에 모였다. 이미 다 장성한 형제들 틈에 장조카가 자리를 함께 했다. 큰 형님의 맏이인 장조카는 우리 형제들보다 서열이 높았다. 장차 제주의 권위를 물려받아 가문을 지켜나가야 할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런 장조카가 삼촌들 틈바구니에 끼어 재롱을 떨다가 삼촌들의 꾐에 빠져든 것이다. 


어린 장조카에게 건넨 귀밝이술은 귀만 밝아지는 게 아니라 세상이 너무 아름답게 보이고 기분이 좋아진다는 등 덕담 이상의 꼬드김이 시작됐다. 첫 잔은 아주 작은 양의 청주가 술잔에 담겨 조카의 입술에 묻어 입안으로 흘러갔다. 조카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몇 방울의 청주를 목젖 아래로 삼켰다. 


짓궂은 삼촌들은 이때를 놓칠세라 조금만 더 마시면 쓰지 않고 달콤하다고 꼬드겼다. 조카는 그 말을 아무런 의심도 않은 채 믿고 독배를 들이켰다. 그런 잠시 후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조카는 키득거리며 삼촌들에게 달라붙으며 좋아했다. 할머니(어머니)한테도 치근덕 거리며 키득거렸다. 어머니께선 그런 조카를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야가 취했나 봐..!! ㅋ"


그런 잠시 후 조카는 따뜻한 아랫목 술항아리 옆 이불에 머리를 쳐박고 곤히 잠들었다. 정월 대보름만 되면 생각나는 해프닝이자 이때부터 배운 술은 날새는 줄 몰랐다. 세시 풍습이 가져다준 너무 아름다운 한 장면이 대형마트로 가는 담벼락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끝!! ^^




LA MEMORIA DEL PLENILUNIO CON MIA MAMMA
il 07 Febbraio 2020, Citta' di Barletta PUGLIA
Fo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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