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에세이 형식이 될 듯 하다. 고백록의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루는 대상에 대한 논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온전한 에세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 있다.
나는 오랫동안 객관적인 형태의 논문을 써오던 습관(習)에 젖어있다. 그래서 주관적인 감정을 흘러가는대로 글쓰는데 익숙치 않다. 이런 종류의 자유로운 글을 써본 지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오랫동안 공부를 하고 연구를 했다. 나의 30대는 온통 연구에 바쳤다. 석사를 두 개 취득하고도 만족을 못했고 박사학위를 받고나서도 이런 저런 새로운 지식에 대한 관심으로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시간만 나면 도서관에 가서 책과 논문을 닥치는대로 읽어야 직성이 풀리던 시절이었다. 나는 지적 편향이 심해서 이 공부, 저 공부를 이 대학, 저 대학을 다니며 했다. 참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몹시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오랫동안 여러 대학원에서 공부하다 보니 수많은 대학원생들, 선후배들과 지적인 교류를 나누게 되었다. 대개 학문을 업으로 삼으려는 친구들은 순수한 편이며 온순한 기질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교수들과 강의시간에 토론을 벌이는 문제투성이 인물이었다. 부잣집 딸이 아니었기에 장학금을 받으려면 교수들과 관계를 원활하게 지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거의 장학금을 받아본 적 없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교수들과 관계가 원만했다면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 적도 있다. 그래서 나는 방학 때 열심히 알바를 뛰었다. 이 모든 것이 10여 년도 훌쩍 지난 이야기이다.
이런 엉뚱하고 별난 나를 좋아해주는 여성 선후배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는 동료는 단 두 명 뿐이다. 오늘 이야기의 주제인 '업(業)'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다. 이 둘은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나에게 지속적으로 연락을 해서 관계가 유지된 이들이었다. 사실 나는 친구가 거의 없다. 나는 일단 머물렀던 공간을 떠나면, 다시는 그 전에 몸담았던 곳의 인연들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지도교수께도 안부인사로 연락한 적 거의 없다. 한 마디로 지멋대로 사는 영혼이었다. 나는 정치를 못했다. 그래서 외톨이 신세였고 스스로 집단으로부터 소외되었다.
사실 박사학위를 받고 나면, 실력은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도찐개찐이라는 말이다. 물론 아주 특출나게 연구능력이 뛰어나서 교수로 스카웃되는 친구도 매우 드물게 있긴 하지만, 그 영광도 대개 남성에게 돌아갔다. 현실적으로 여성 박사에게 교수 임용의 기회가 거의 오지 않는 편이다. 논문 발행수나 집필 저서로 보아 남성박사의 스펙과 비교해 매우 월등하게 뛰어나지 않는 한, 임용되기 어렵다. 물론 예외는 항상 있다. 그 여성박사가 해외유학파이거나 서울대 출신이거나 또는 지방대 출신 박사여도 그 학과 교수님들이 만장일치로 신뢰를 크게 얻을 때는 임용되는 것을 보았다. 그래도 그 전공을 보면 예술 분야나 어문학 전공을 한 여성들이 90% 이상이다. 이들 분야는 여성박사가 타전공에 비해 월등히 많기 때문에 숫적으로 남성들이 불리하다.
하지만 디자인 분야는 다르다. 나의 지인은 디자인 분야의 박사, 도시공학 분야의 박사 이렇게 박사학위를 두 개나 취득했지만, 교수 임용이 안되고 있다. 그녀는 어느덧 40대 후반의 나이가 되었다. 주변의 남자 박사 동료들이 하나씩 교수 임용이 되어가는 것을 수년 간 보아오면서 가슴에 울분을 쌓아 온 그 동료는 나에게 가끔 전화해서 속상함을 풀곤 한다. 그녀의 전화가 울릴 때면 뻔한 하소연을 직감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학기에도 강의를 22시간이나 맡아 하고 있다. 지방의 여러 대학을 오가면서 강의를 하고 있지만, 강의조차 없는 나에 비하면 행운 아닌가.
그녀는 교수 임용이 안되면 인생 실패자처럼 여기는 염세적 경향이 매우 강했다. 계약직인 강사직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전국 대학에 교수 숫자보다 강사 숫자가 몇 배로 많다. 정교수로 임용되지 못한 수많은 강사들이 오늘도 학생들의 수업 준비에 열과 성의를 다하고 있다. 실제로 강사들은 정교수들이 꺼려하는 강의들을 곧잘 도맡아서 새로운 강의를 준비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나도 고려대에서 강의할 적에 듣도 보도 못한 '디자인 기호학'이라는 강의를 덜컥 맡아서 밤새 공부하면서 강의준비를 하느라 고생했던 경험이 있다.
나는 그녀가 취득한 공학박사와 디자인학박사의 가치를 충분히 활용할 만한 윗선의 교수님을 만나면 교수임용의 가능성이 있다고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실제로 그녀는 착하고 명랑한 편이라 교수들과 사이가 원만하고 좋은 편이었다. 교수들 업무도 곧잘 돕고, 부탁은 거절 못했다. 나의 태도와는 천지 차이인 것이다. 나는 교수의 노골적인 부탁을 거절한 적도 있고, 일방적인 희생을 해야 하는 학회 업무는 도중에 그만두어 버리고, 박사들 가운데 맡은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공식적으로 망신을 주기도 하고, 아무튼 나는 정치를 잘하지 못했다.
그런 내가 최근 그녀와의 통화에서 참다못해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그렇게 교수 임용이 되고 싶으세요? 그러면 정치를 하세요. 선생님의 연구 실력이 비상해서 논문으로 승부할 자신이 없으면, 결국 방법은 하나에요. 정치를 하면 됩니다. 정치를 하려면 공을 들이고 돈을 들이고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교수들의 맘을 구워 삶는 수 밖에요. 남자박사들도 실력만으로 승부하지 않아요. 그들도 다 정치를 해요. 교수들께 잘 보이지 않고 교수가 된 인물이 어디있습니까? 정치가 나쁜 게 아니에요. 더 솔직히 말씀드릴까요? 정치를 하지 않는 한, 선생님께서 교수 임용이 되기 어려울 거에요 " 이미 나의 목소리는 하이톤으로 변해있었다.
사실 나는 학계 정치가 무엇인지 아주 잘 알았다. 국회나 기업에만 정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 어디든 조직이 형성된 곳은 정치가 존재한다. 교수와 박사 혹은 교수와 강사 사이에도 당연히 정치가 존재한다. 그것은 교수 임용을 둘러싸고 보이지 않게 형성된 암묵적 힘으로 작용한다.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침묵했다. 잠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그런 후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제가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어요. 감사해요. "
그러자 나는 별안간 머쓱하고 미안해졌다.
"아니.. 선생님의 능력이 출중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정치도 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거에요"
그녀는 나직한 톤으로 이렇게 말했다.
"네. 사실 저도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사실 그런 돈을 마련한다는 것이 무모한 모험란 걸 너무 잘 알아요. 예전에 그렇게 임용되려고 교수들께 봉투를 드렸다가 교수 임용이 안 된 사례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돈은 회수가 안되더라는. 후훗"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씁쓸함이 밀려왔다. 나는 그녀가 부정적으로 현실 인식을 할 때마다 긍정적인 희망을 주려고 노력했으나, 이번에는 쓴소리를 했다. 그러자 도리어 그녀는 그런 부패한 현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체념하는 태도로 변했다.
나는 그녀에게 교수 임용이 안된다 해도, '연구하고 가르치는 강사' 라는 업(業)이 얼마나 고상한 것인가 하는 점을 강조했다. 겉보기에 화려한 감투보다 그 업의 진정성이 더 소중하다고 했다. 교수임용이 안된다 한 들, 오랫동안 공부하고 축적된 지식과 탐구능력은 머리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대학시절 어느 강의에서 교수님께서 이런 얘기를 하신적 있다. "여러분의 집에 불이 나서, 가진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다고 합시다. 그래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게 있다면 뭘까요?" 우리는 대답을 못하니, 교수님은 조용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바로 머리 속의 자산, 지식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요." 그 말은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
어차피 식자(識者)는 떠돌이다. 마키아벨리든, 프랑스 혁명의 꽃은 아니었지만 목숨 구걸하다 반미치광이가 된 승려투사 사포이던 간에, 자유를 포기한 권력지향자들은 슬프다. 지식인은 무궁한 떠돌이 별이 숙명인 것을. 학문을 통해 진실을 추구하는, 별을 따려는 아이처럼 방랑이 숙명임을 깨달을 때 업(業)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 세속적 권력의 성패 여부로 나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결코 '직업으로서의 교수'를 얻기 위해서만 공부하고 연구하지 않았다. 정작 교수가 되어도 행복하지 않은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비굴한 표정으로 논문을 대신 써달라고 부탁한 교수의 눈을 잊을 수 없다. 왜 힘에 발 묶으려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