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성 지식인을 둘러싼 직업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유는 이들의 정신세계가 일반여성들과 대비하여 복잡하며, 사회구성원으로서도 소수에 지나지 않아 상대적으로 경쟁에서 취약한 구조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소수 엘리트 계층으로 특혜를 볼 수도 있지만, 운이 나쁘면 사회주변부로 밀려날 수도 있다. 훌륭한 교육을 받고 유능함을 가지더라도 일자리 기회의 배제로 노력에 비해 지위와 소득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지식인’이라는 범위를 무엇이라 정의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는 전문직을 가져야 지식인이라거나 소위 엘리트계급을 통칭하는 표현으로 지식인이라고 일컫지만 사전적 의미에서 지식인은 ‘지식을 가진 자’일 뿐이다. 전문가적 지식을 가진 인물이 아니어도, 석박사 학위가 없더라도 어떤 대상에 관해 해박한 식견과 통찰을 가졌다면 충분히 지식인이라 칭할 수 있다.
여성박사의 경우, 사회적 지위와 소득에서 우위를 얻지 못하면 오랫동안 힘들여 학문 연구에 투입되었던 엄청난 자금과 노력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이는 변호사나 교사와 같이 국가자격증을 갖춘 여성들과 차별화되는 점이다. 이들 국가공인 지식인과 대학공인 지식인은 모두 엄청난 노력을 한다는 점에서 같으나, 각 직업에서 필요로 하는 업무와 기량은 서로 다르다. 각각이 속한 조직에서 갖추어야 하는 노동력이 다르다.
교사가 적당히 숙련된 중간숙련근로자라면, 교수는 고도로 훈련된 상위숙련근로자라고 볼 수 있다. 박사 역시 고도로 훈련된 상위숙련근로자이다. 박사는 엘리트 교육을 받고 여러 단계로 이루어진 혹독한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일생토록 독서와 토론, 글쓰기로 이어지며 능력을 입증하고 고급학위로 마무리되는 교육과 경쟁을 통과해도, 정규직 임용이 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남아있다. 문제는 그 경쟁의 기회가 불평등하다는 것이다. 교수들의 추천을 통해 이루어지는 임용 절차에서 추천조차 받지 못하면 기회 자체가 배제될 수 있다. 이런 체제에서 탄생한 교수와 그렇지 못한 강사는 같은 엘리트 계층이어도 무력감에서 벗어날 길 없다.
박사나 강사들이 교수나 정규직 연구원이 되고자 하는 것은 연봉이 높고 안정된 직업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소득을 점유하는 소수의 중심부와 좀 더 숫자가 많고 그 테두리에서 일하는 주변부로 구성된다. 소수의 교수나 정규직 연구원이 고수익을 창출하며, 그들을 지탱하는 일자리를 주변부 강사나 박사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런 생태계에서 부유층계급과 그에 종속된 중간층계급이 형성된다. 또 하나의 계급이 존재한다. 체제 바깥으로 떨어져 나와 홀로 떠도는 무한(無限)계급이 그들이다. 그들은 암담한 현실에 암울한 일자리를 택할 수도 있다. 그것은 생존에 대한 무시무시한 정신적 압박으로 작용한다.
실제 내가 교류한 여성박사 가운데 한 명도 이런 끔찍한 상황에 놓일 것을 밤낮으로 걱정한 나머지 결국 위암에 걸리고 말았다. 그녀는 불교철학 박사로서 좋은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20년 가까이 모 불교 종단이 운영하는 대학의 연구원에 계약직 연구교수로 근무해왔다. 그런데 최근 대학의 학생수가 크게 줄어들자, 종단에서 대학 연구원을 폐쇄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거기서 근무한 연구교수들이 졸지에 거리에 나앉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 연구원은 고용보험에도 가입하지 않은 것이었다. 퇴직금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격분한 연구교수들이 기관을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과정에서 그녀는 경제적 불안과 생존을 둘러싼 초조함에 휩싸여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사실 그 직장은 그녀가 항상 그만 두고 싶어 하던 곳이었다. 매번 그녀는 말버릇처럼 “직장을 때려치고 명상만 하고 살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그 연구원은 불교철학 연구보다 불교 관련 학술 행사를 수없이 치러내는 게 주요 업무인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직장을 떠나 딱히 갈 곳도 없었던 그녀는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를 견디기 위해 명상을 시작했다. 명상이라고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고 토로하곤 했다. 하지만 명상은 현실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었고, 그녀는 위암 3기라는 진단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