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하루에 몇 번이나 이 말을 하는지 세어본 적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며 한 번, 누군가 안부를 물어볼 때 한 번, 하루를 마무리하며 또 한 번.
그런데 정말 괜찮았을까.
조용한 무너짐
어린 시절부터 배웠다. 울면 약한 거고, 힘들다고 하면 지는 거라고. 특히 남자아이에게는 더욱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남자가 그런 걸로 운다고?" "좀 참아라, 별것도 아닌 걸로." "힘든 건 다 힘들어. 그래도 해야지."
그렇게 나는 감정을 접는 법을 배웠다. 아프면 아프다고 하지 말고, 슬프면 슬프다고 하지 말고, 무서우면 무서워하지 말고. 그냥 '괜찮다'고 하면 되는 거라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은 습관이 되었다. 반사적으로 나오는 자동 응답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실제로 괜찮은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말하는 게 편했다.
하지만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어딘가 깊숙한 곳에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내가 나를 모르게 된 시간
언제부턴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 "지금 기분이 어때?"라고 물어보면, 대답할 수가 없었다.
기분이 어떤지 모르겠다는 게 아니라, 정말로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마치 감정의 스위치가 꺼진 것처럼.
"그냥... 그냥 괜찮아."
항상 같은 대답이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화날 때도. 모든 감정이 '괜찮음'이라는 하나의 색깔로 덮여버렸다.
처음에는 편했다. 감정의 기복이 없으니 안정적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실망시킬 일도 없고, 내 감정 때문에 누에게 피해를 줄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게 함정이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서, 나 자신도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 아이가 울던 날
코칭을 하던 중이었다. 중학교 2학년 아이가 연습 도중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별것 아닌 실수였는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왜 울어? 괜찮잖아. 이런 걸로 우는 게 아니야."
내가 던진 말이었다. 그 순간 아이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봤다. 눈물을 급하게 닦으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
"죄송해요. 괜찮아요."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서 무언가가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날 밤, 나는 계속 그 장면을 떠올렸다. 왜 그 아이는 울었을까. 정말 별것 아닌 실수였는데. 그리고 왜 나는 그 울음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며칠 후, 그 아이의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생님, 우리 아이가 요즘 야구가 재미없다고 해요. 집에서도 말이 없어지고..."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그 아이에게 한 일이 무엇인지.
스윙이 이상했는데, 나는 몰랐다
다시 그 아이를 관찰해보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즐겁게 뛰어다니지 않았다. 실수를 해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잘해도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기분이 어때?"라고 물어보면 항상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괜찮아요."
그제야 보였다. 그 아이의 스윙이 이상하다는 걸. 몸은 기계적으로 움직이지만, 마음이 빠진 스윙이었다. 야구를 치는 게 아니라, 그냥 과업을 수행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모습에서 나 자신을 봤다.
언제부턴가 나도 그렇게 살고 있었다. 코칭을 하지만 마음이 빠진 코칭, 사람들과 만나지만 감정이 빠진 만남, 하루하루를 살지만 살아있다는 느낌이 빠진 일상.
모든 게 '괜찮다'는 회색빛으로 칠해져 있었다.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 후로 주변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괜찮다'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지.
"요즘 어때?" "괜찮아."
"힘들지 않아?" "괜찮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괜찮아. 혼자 할 수 있어."
모든 대화가 '괜찮다'는 벽에 부딪혀 멈춰버렸다. 진짜 대화는 시작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괜찮았을까. 아니면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걸까.
부모님의 '괜찮다'
어느 날 부모님과 통화를 했다. 안부를 묻는 일상적인 통화였다.
"아버지, 요즘 어떠세요?" "괜찮다. 별일 없어."
하지만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뭔가 힘이 없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괜찮다고 했잖아."
며칠 후 어머니로부터 따로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몸이 안 좋으시다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왜 아버지는 '괜찮다'고 하셨을까.
"아버지가 걱정 끼치기 싫어하셔서..."
어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 내 가슴이 먹먹해졌다. 우리 가족은 언제부터 서로에게 '괜찮다'는 거짓말을 하며 살게 되었을까.
침묵이 만든 거리
'괜찮다'는 말 뒤에는 침묵이 있었다.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침묵, 더 이상 들어주지 마라는 침묵.
그 침묵이 사람들 사이에 거리를 만들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큰 거리가 생겼다. 정작 가장 솔직해야 할 사람들에게 가장 큰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
나도 그랬다. 힘들수록 '괜찮다'고 말했다. 도움이 필요할수록 '혼자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외로울수록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나는 나 자신과도 거리를 두게 되었다.
괜찮지 않다고 말할 용기
그 아이와 다시 마주 앉았다. 이번에는 다른 질문을 했다.
"괜찮은지 말고, 지금 진짜 어떤 기분인지 말해볼래?"
아이가 당황했다.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나 보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천천히 생각해봐. 기분이 어떤 색깔 같아?"
한참을 생각하더니 아이가 말했다.
"회색이요. 좀 답답하고... 무거운 회색."
그 순간 아이의 눈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자신의 감정을 처음으로 말로 표현해본 순간이었다.
"회색이구나. 그럼 그 회색을 좀 더 자세히 말해볼 수 있을까?"
아이가 말하기 시작했다. 실수할까 봐 무서웠던 마음, 혼날까 봐 걱정됐던 마음, 야구가 재미없어진 마음, 하지만 그만둘 수도 없어서 답답한 마음.
그 모든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나의 '괜찮지 않음'을 인정하기
그날 밤, 나도 나 자신에게 같은 질문을 해봤다.
"지금 진짜 어떤 기분이야?"
처음에는 습관적으로 '괜찮다'는 말이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억지로 그 말을 삼키고, 다시 물어봤다.
"정말로, 진짜로 어떤 기분이야?"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오랫동안 괜찮지 않았다.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았고, 항상 부족한 것 같았고, 가끔은 무섭기도 했다. 외로웠고, 피곤했고, 가끔은 모든 걸 내려놓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동안 그 감정들을 '괜찮다'는 말로 덮어왔다.
처음으로 한 고백
며칠 후, 가까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즘 어때?"라는 친구의 질문에, 나는 평소와 다른 대답을 했다.
"사실... 괜찮지 않아."
전화 너머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친구가 말했다.
"그렇구나. 어떤 게 괜찮지 않아?"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누군가 내 '괜찮지 않음'을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외로웠는지, 얼마나 무서웠는지.
말하고 나니 이상했다. 세상이 무너지지 않았다. 친구가 나를 약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감정의 언어를 되찾기
그 후로 조금씩 연습하기 시작했다. 내 감정을 정확히 이름 붙이는 연습.
슬픔, 분노, 두려움, 외로움, 불안, 초조함, 답답함... 그동안 '괜찮다'는 하나의 단어로 묶어버렸던 수많은 감정들이 각자의 이름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감정을 정확히 이름 붙일 수 있게 되니까, 그 감정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슬플 때는 울어도 된다는 걸 알게 되었고, 화날 때는 화가 난다고 말해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 무서울 때는 도움을 요청해도 된다는 것도.
코치로서의 새로운 발견
아이들과의 관계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괜찮아'라는 말로 감정을 차단하지 않았다. 대신 함께 그 감정을 들여다봤다.
"실수해서 화가 났구나." "이기지 못해서 속상하구나." "잘하고 싶은데 잘 안 되어서 답답하구나."
그런 말을 들은 아이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본다는 안도감, 혼자가 아니라는 따뜻함이 얼굴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감정을 인정받은 아이들이 더 잘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작점
그날 나는 처음으로, '괜찮지 않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자존감은 내가 완벽해야 생기는 게 아니었다. 내가 강해야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괜찮을 때도 괜찮지 않을 때도, 모든 감정을 가진 나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생기는 거였다.
'괜찮다'는 거짓말 뒤에 숨어 있던 진짜 내가, 마침내 숨을 쉬기 시작했다.
당신이 가장 자주 하는 '괜찮다'는 거짓말은 무엇인가요?
언제부터 당신은 자신의 감정을 모르게 되었나요?
지금, 정말로 당신의 마음은 어떤 색깔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