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음 H

Adios, 나의 꿈

by 봄밤

전지현이 HBAF 광고에서 "H는 묵음이야"라고 말할 때마다 나 자신이 꼭 묵음 H 같았어요.

우연이지만 내 이름도 H로 시작되거든요.

H가 아닌 BAF로 살고 싶었지만 내 노력이 부족해서 실패했어요.

꿈을 버린 거죠. 꿈을 버리고 나니 묵음 H가 되더라고요.

묵음 H가 되어서 열심히 살았어요.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고 남편의 실수에도 헤어지지 않고 살았어요.

여기서 우울하면 묵음으로서도 실패한 삶일 테니까 감사한 일들을 계속 떠올리면서요.

생산성은 없지만 감정은 바닥을 치는 일들을 견디면서 열심히 산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우울한 묵음 H가 돼버렸지 뭐예요.

꿈을 버린 대가가 크더라고요.


핑계는 아니고요, 아니 핑계예요. 그냥 핑계를 댈게요. 오늘만요.


무대에 서는 게 좋았어요.

피아노도 미술도 그저 그랬던 내가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부분이 무용이었어요.

빌리엘리엇이 왜 발레를 하냐는 질문에 하늘을 나는 새가 된 것 같다는 말이 꼭 맞았어요.

정말 그렇더라고요.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무용을 하기엔 주변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게 어려웠어요.

각자의 삶이 있으니까요.

그래도 꾸역꾸역 어떻게든 꿈을 지켜보려고 했죠.

독립투사 같은 마음으로요. 하지만 지켜야 할게 내가 낳은 아이인지, 꿈인지 점점 헷갈리더라고요.

아이는 낯을 많이 가렸고 할머니조차 감당하기 힘들어했어요.

어린이집 적응을 못했고 원장선생님께 퇴소 권유를 받은 날엔 처음으로 무대에서 순서를 틀렸어요.

그때 결심했죠.

꿈을 버리면 편할 수도 있겠다.


오래전 갑자기 이별한 꿈 이야기예요.




올해는 묵음 H가 많은 용기를 냈어요.

발음이 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의 용기.

여전히 묵음 H지만 이젠 괜찮아요.

나의 꿈에게 그때 못한 인사를 하고 싶어요.

안녕.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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