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상은 날지 않는다
사람들은 상처가 보이면 치료를 권한다.
피가 나면 거즈를 대고,
멍이 들면 얼음을 얹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상처,
속에서 터진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내상은 소리 없이 진행된다.
겉은 멀쩡한데,
안쪽에서는 무언가가 부서지고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나비를 두려워했다.
정확히 말하면,
나비가 내 안에서 날아다니는 것을.
꿈에서 나는 종종 가슴을 열고,
그 속을 들여다본다.
심장은 없고, 대신 수많은 나비가 있다.
날개는 유리처럼 얇고, 가장자리는 깨져 있다.
날개가 퍼덕일 때마다
작은 파편들이 살에 박힌다.
고통은 늦게 온다.
먼저 소리가 난다—바스러지는 소리.
사람들은 나비를 변신의 상징이라 말한다.
애벌레가 번데기를 찢고 나오는 장면은
아름답다고.
그러나 그 장면을 확대해 보면 피가 흐른다.
찢는다는 것은 언제나 폭력이다.
껍질은 스스로 찢기지 않는다.
내부에서 압력이 차오를 때,
어쩔 수 없이 터진다.
그 압력의 이름이 바로 내상이다.
나는 평온한 표정을 연습했다.
웃는 얼굴을 오래 유지하면,
안쪽의 금이 덜 드러난다고 믿었다.
그러나 거울은 알고 있다.
빛이 비스듬히 들어오면
균열은 반드시 드러난다.
그때마다 거울 속의 나는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 움직임에 놀란 나비 한 마리가 날아오르고,
날개가 거울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진다.
유리는 깨지지 않는다.
대신 날개가 깨진다.
항상 더 약한 쪽이 부서진다.
내상은 기억을 먹고 자란다.
사소한 말, 지나간 손짓, 애써 무시했던 시선—
그것들이 사료가 된다.
내 안의 나비는 그런 것들을 삼켜 더 화려해진다.
색은 진해지고, 무늬는 복잡해진다.
바깥에서 보면 성숙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화려함은 무게다.
날개가 무거워질수록 날기는 어려워진다.
밤이 오면 가슴속이 소란해진다.
나비들이 벽을 두드린다.
출구를 찾는 소리다.
나는 숨을 억누른다.
숨을 크게 쉬면 문이 열린다.
문이 열리면,
그들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방 안을 채운다.
벽과 천장에 검은 그림자가 붙고,
심장은 그 자리를 잃는다.
나는 심장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장면을 반복해서 꿈꾼다.
어떤 공포는 미리 연습할수록 선명해진다.
한 번은 의사가 내 가슴을 청진했다.
“이상 없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나비의 소리는 파열음이다.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뼈로 느끼는 소리다.
그것은 청진기의 범위를 벗어난다.
내상은 치료되지 않는다.
다만 정리될 뿐이다.
나는 매일 밤 나비의 이름을 적는다.
잊힌 약속, 미뤄둔 사과, 삼킨 분노—
각각에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갖는 순간, 나비는 잠시 멈춘다.
날개를 접고, 바닥에 내려앉는다.
그 틈에 나는 작은 상자를 만든다.
유리로 된 상자다.
안쪽에는 부드러운 천을 깐다.
그들을 가둔다기보다, 눕힌다.
그러나 유리는 완전하지 않다.
미세한 균열이 반드시 생긴다.
그 균열 사이로 한 마리가 빠져나온다.
그것이 바로 공포의 방식이다.
완벽을 가장한 틈.
새벽이 오면,
나는 상자 앞에 앉아 한 마리씩 풀어준다.
날개가 다친 나비는 멀리 날지 못한다.
대신 천천히, 낮게 날아간다.
방바닥을 스치며 사라진다.
나는 그것을 회복이라 부르지 않는다.
다만 통과라고 부른다.
통과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오는 것은 통과하지 못한 것뿐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괜찮아졌어?”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괜찮음은 상태가 아니라, 계약이다.
나는 이제 나비와 계약을 맺었다.
밤에는 날고, 낮에는 잠든다.
날개는 여전히 깨져 있다.
하지만 깨진 날개로도 방향은 잡을 수 있다.
내상은 끝나지 않는다.
다만, 나비는 더 이상 가슴을 찢지 않는다.
이제 나는 그들이 날아오를 때,
문을 조금 열어둔다.
너무 넓지 않게. 너무 닫히지도 않게.
공포는 관리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야기로 남는다.
그리고 이야기는—가끔—살을 덜 찌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