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마지막 겨울날
《잿빛 나비》
3화. 마지막 겨울날
그해 겨울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바람도 눈도, 아무런 소란을 일으키지 않은 계절.
사람들의 발걸음이 느려졌고, 말끝은 점점 작아졌다.
그리고, 서은은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소리 없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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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나중에 진짜 봄이 오면,
나랑 같이 무대 보러 갈래?”
서은은 방 한쪽에서 조심스럽게 묻곤 했다.
그 물음에 은서는 늘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응, 같이 가자.”
하지만 대답은 그저 습관이었다.
서은의 눈은 점점 흐려져 갔다.
어디에도 닿지 않는,
맑은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는 눈빛.
“요즘엔 꿈이 안 보여.”
“왜?”
“아무리 눈을 감아도, 하얀 것밖에 없어.”
그 말을 들은 날, 은서는 처음으로 무서워졌다.
그 눈부신 하얀색이, 절망의 빛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
12월의 어느 밤.
은서는 부엌에서 물을 마시다 서은의 방 문틈을 바라보았다.
불은 꺼져 있었고, 그림자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문득, 서늘한 기척이 등에 스쳤다.
설마, 하는 마음이 가슴 깊숙이 떠올랐다.
은서는 문을 열었다.
서은은 침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 위로 담요가 흘러내렸고, 머리는 부스스했다.
하지만 얼굴은 조용했다. 아주 조용해서, 불안할 만큼.
“무슨 생각해?”
“그냥... 내가 진짜 여기에 있는 건가, 그런 거.”
“서은아, 너 지금 여기 있어. 나랑 같이 있잖아.”
서은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대신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응. 언니 목소리는 진짜야.
가끔은 그것만 들리는 날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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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서은은 사라졌다.
새벽녘,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
은서는 그날을 수없이 반복해서 떠올렸다.
혹시라도 무언가 다른 말을 했다면,
혹시 그날 문을 닫지 않았다면,
혹시… 정말로 무대에 데려갔다면.
하지만 그 모든 ‘혹시’는 과거에 머물렀고,
현실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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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는 마지막으로 서은이 쓰던 노트를 꺼냈다.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겼다.
삐뚤한 글씨. 연필 자국. 낙서처럼 적힌 대사들.
그리고 한 페이지 아래, 연하게 적힌 문장이 있었다.
> 언니는, 내 봄이었어.
나는 그 옆에서 자라난 그림자였고.
그 문장 앞에서, 은서는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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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여전히 겨울이었지만,
은서에게 그 겨울은 멈춰 있었다.
하얗고 조용한 그날.
모든 말들이 흩어지고, 시간조차 입을 다물던 날.
그날이, 서은의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