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성장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내가 주말 아침마다 가는 독서모임은 4명씩 소그룹을 이뤄 대화한다. 돌아가면서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아주 적절한 인원이다. 그러하니 신청할 수 있는 인원 수가 정해져 있다. 운영진만 모임을 개설할 수 있고 선착순인지라 모임이 개설되면 자리를 잡기 위해 신경 써야 하고, 아쉽게도 놓친 경우가 발생해 불편했다. 1년 이상을 참다가 결국 운영진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제 자리에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원하는 일자에 모임을 개설할 수 있다!
이토록 간단한 것을 왜 1년 넘게 풀지 않았느냐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고개 드는 '잘하고 싶은 마음'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책임감이 강한 성향이고 나쁘게 말하면 완벽주의로 인한 결단의 지연이다. 최근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친구와 저녁을 함께했다. 그동안은 바빠 이야기 나눌 새도 없었지만, 사실 친구는 메리지블루로 힘들었다고 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온갖 선택과 결정을 요구받는 환경에 스트레스는 물론이었다. 거기에 덧붙여 아무도 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요구하지 않았는데, 무언가 잘 해내야 할 것 같은 감각 때문에 끙끙 앓았다고 했다.
아, 나 그거 알아.
끼리끼리는 사이언스라고 했던가. 내 친구들은 첫째가 많다. 두 살 터울 동생이 있는 것까지 비슷하다. 그리고 한 살 터울의 책임감이라는 녀석과 함께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 첫째들의 특징인지도 모른다. 나의 부모와 너의 부모가 아닌 우리의 부모님께 잘해야 한다는 느낌은 친구에게 와장창 짐을 안겨 주었고, K-결혼식의 온갖 허례의식과 결혼식은 부모님의 행사라는 무시 못할 고전적 인식까지. 이를 뒤로하고도 잘은 모르겠는데 잘하고 싶은 기특하면서 측은한 마음은 우릴 괴롭히기에 넘치다 못해 언젠가는 뭐라도 부숴버릴 것만 같다.
어떤 책임과 자리는 마치 손질되기 좋은 재료인양 나를 가볍게 이 도마에 올려둔다. 사실 운영진의 역할이 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기 좋아하는 활동이 어떤 무게를 가진다는 것에 부담을 느껴 피해왔다. 하지만 성장형 캐릭터인지 나는 결국 받아들이기로 한다. 폭풍이 지나가고 더욱 어른스러워진 친구를 보며, 사실은 늘 스스로와의 싸움이었음을. 시간은 흐르고 사람은 변하고 어디든 나아가지 않는 것은 없다고 믿는다. 단지 속도의 차이일 뿐.
독서모임이 좋은 이유에서 모임의 근황을 전하게 된 요지는, 결국 내가 소속된 곳이니 이제는 좋아할 수밖에 없어졌다는 것에 있다. 스스로는 좋은 영향력을 주고 싶은 운영진이 하나 늘었다는 꿈보다 해몽을 적어본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은 주말인지라 이전까지 모임을 하고 온 길이다. 이 글을 구상하며 적어야지 했던 점들을 몇 가지 옮겨본다.
독서를 위해 만나긴 했지만 대화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기에 나의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말하는 연습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주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말을 잘하듯이, '말하기'와 '나의 생각말하기'는 연습이다. 어떤 주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견고하게 말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주로 보고 듣기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을 아무런 근거 없이 이어가는 것과 책이라는 매개나 기반을 하여금 말하거나 설명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도움닫기가 되기도 하고 자신과 타인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알아보거나 이해할 수 있다. 써놓고 보니 너무 식상한 말을 늘어 놓은 것 같아 내가 보기에도 지루하다.(하지만 정말이니까..)
독서 방법에 대해서도 조금 이야기할까 한다. 다들 저마다 책을 고르는 기준이나 독서 방법에 차이가 있다. 모임을 하면서 그 차이를 인식하기도 하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보며 다양성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나의 경우, 정보나 내용 전달 위주의 책은 가독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내가 가져온 책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하기에 나의 원래 독서법과는 다른 시각으로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학창 시절, 옆 친구에게 가르쳐주면서 공부하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런 관점으로 독서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중 나에게 인상 깊었던 부분이나 경험과 연관 지어 설명한다면 내가 가져온 A라는 책에 'A-윤음' 버전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보는 이의 몫이 된다. 작품해설을 얹을 수도 있지만 그 작품 자체가 사람마다 주는 울림에는 차이가 있다. 독서모임에서는 이렇듯 책을 각자의 버전으로 소화해 볼 수 있다.
오늘의 모임에서는 (잘 때 꾸는) 꿈에서 시작해 나르시시스트와 양심 기업, 미국 정치에 대한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어찌 이런 대화가 단시간에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사실 난 거시경제에 있어 응애 수준이다. 혼자라면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세계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다니 역시 독서모임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고로, 이 주제는 번호를 달고 또 나올 예정이다.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거나 보내고나면 생산성이란 잘익은 과실의 달콤함까지 맛보게 되는데 주말의 후식으로 이만한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