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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더럽히는 꽤 멋진 습관

모든 실패는 훌륭하다 #5

by Yoon

4년 전. 결혼을 앞뒀을 때였다.


애지중지 키운 딸을 시집보내며 아빠는 쓸쓸해하셨다. 딸과 시간을 보내고 싶으셨던걸까. 어느 날은 '뭐하냐' 하시며 불쑥 내 방에 들어오셨다. 신혼집으로 옮길 짐을 싸고 있었던 나는 아빠의 센치함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다짜고짜 짐 좀 싸달라 청했던 것 같다. 가장 무거운 책이 아빠의 몫이었다. 아주 천천히 책 한 권, 한 권을 훑어 라면 상자에 담는 아빠의 모습이 유리창이 비췄다. 코 끝이 찡했다. 그래. 결혼 전 부녀의 애틋함이란 바로 이런 거지. 어릴 적 추억담이라도 나누며 그 애틋함을 배가시키려던 나의 계획은, 아빠의 한 마디에 전면 수정됐다.


"딸아. 그런데 어째 읽은 책이 한 권도 없냐."


그렇다. 수 백 권의 책은 하나같이 깨끗했다. 앞장을 뒤로 꺾어 읽은 흔적도, 어느 한 장 접어둔 흔적도 없었다.


그냥 책 사는 걸 좋아했다. '어머, 이건 꼭 사야 해.' 하며 이쁜 책, 카피와 제목이 매력적인 책을 무턱대고 사들였다. 하지만 끝까지 읽은 책은 손에 꼽았다. <수학의 정석> 집합 이후의 챕터가 그러했던 것처럼.



다른 나라에 와서 살게 됐다.

배송비를 더하니 책값이 3,4배로 뛰었다.


총알 배송도 무료 배송도 남의 나라 이야기가 됐다. 비싼 값을 치루고 오래 기다려 책을 갖게 되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꼭 끝까지 읽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책을 더럽히기 시작했다.



1. 읽다 눈길이 머무는 곳에 밑줄을 그었다.



2. 그걸 맨 앞 속지에 옮겨적었다.

모든 책의 표지 뒷면에는 1,2장의 속지가 있다. 그 공간을 아주 유용하게 썼다.




3. 읽다 만 책을 다시 펼친다.

언젠가부턴 페이지 수를 같이 적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끼적여놓은 그 페이지 수가 네비가 되어주었다. 끼적였던 마지막 문장을 읽노라면 며칠 전 책을 덮던 그 순간과 이어지는 기분이었다.


4. 책의 마지막 한줄까지 짜내 읽는다.

책을 끝까지 읽는 순간- 아주 비싼 갈비탕을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신 기분이다. 책은 비싼 값을 하고도 남았다. 희열을 만끽하며 다시 첫장으로 돌아가 날짜를 적었다.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을 다 읽은 날.


5. 그 문장 그 맥락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

그럴 때면 책장에서 빼들어 속지를 펼쳤다. 참 신기하게도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떠다니던 그 문장이 거기 있다.



책을 더럽게 읽는 습관을 갖게 된 후,

무엇이 달라졌을까.


사는 재미 뿐 아니라 완독의 재미를 알았다. 어지간한 책은 끝까지 읽었다. 책을 고르고, 사는 일이 더 즐거워졌다. 책을 살 때면 들던 죄책감도 없어졌다. 다 읽으리란 걸 아니까. 언제고 써먹어야 할 때 이보다 유용한 DB가 없다.


진짜 내 책이 된 거다.

수 백 권의 책지랄 끝에 갖게 된 참 멋진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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