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은 꽤나 특별했다. 길고 험난했던 프로젝트를 마무리한 까닭. 정리 모임을 갖고 자리로 돌아와 크게 숨을 뱉었다. 후들거리는 다리 부여잡고 기어이 산을 내려온 기분이었다.
등으로 내 후련함을 들은 내 팀장님, 의자를 돌려 눈썹을 찡끗-하신다. 잘 마쳤구만. 이런 뜻이었다. 내친김에 지난 몇 주 동안의 긴장을 수다로 풀었다. 이번 겨울 한국에 있을 때 꼭 해보고 싶었던 일들이 숱했는데, 이 프로젝트에 집중하느라 그 로망들을 죄다 놓치고 말았다고 푸념했다.
'너의 이름은'을 보고 싶었다. 광장시장 육회 한대접 하고 싶었다. 서점에서 책 한권 사들고 카페에서 여유도 부리고 싶었고, 그 맛있다는 커피앳웍스 바닐라 뭐시기도 먹고 싶었다.
한참 쏟아놓고 나서야 머쓱해졌다. 처음부터 내가 벌인 일. 팀장님은 그저 묵묵히 응원과 커피만을 내밀었을 뿐.
머쓱함에 "그래도 재밌었어요"같은 멘트로 서둘러 마무리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의자를 돌려 메일 한 통 확인하는 사이, 카톡이 울렸다.
팀장님은 손도, 마음도 빨랐다. 잔뜩 들떠 서둘러 반차 신청부터 했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있는데 인트라넷 알람이 뜬다. 휴가신청을 반려한 각잡힌 한 줄.
"지난 주말 근무의 대체 휴가로 다시 신청 하세요."
그렇게 태어나 처음, 사람 하나 없는 영화관을 누렸다. 첫번째 로망이었다.
평소 맥주를 즐기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그 무어라도 즐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호기롭게 맥주를 홀짝이며 상영 전 광고까지 달게 봤다.
다음 로망은 광장 시장. 대낮의 시장이 뿜는 활기는 대단했다. 곳곳에 묻은 오랜 삶의 흔적, 화끈한 맛의 흔적, 어느 하나 좋지 않은 것이 없었다.
광장 시장은 모름지기 육회. 혼자 한그릇을 싹싹 비웠다. 소금과 참기름을 머금은 육회를 오물조물 씹고 있으니 생각나는 2가지. 소주 한잔, 그리고 함께 맛을 논할 오랜 벗.
세번째 로망, 책냄새. 오랜만에 문을 열었다는 종로서적을 찾아갔다. 머릿속에 그리던 오랜 책 냄새는 없었지만 저마다의 멋진 이름을 뽐내는 수십 만권의 책 앞에 마음이 동한다.
한 권을 골라 네번째 로망, 커피숍을 찾아나섰다. 커피앳웍스의 바닐라크림어쩌고저쩌고. 오래 걸은 탓에 목이 타서 단박에 목구멍으로 털어놓었다. 달고 시원했다.
슬쩍 비친 내가 괜히 이뻐 보이는 유리창 앞에 앉아 골라온 책을 읽었다. '빨강머리앤이 하는 말'
.
오래 걸은 탓일까 춥던 몸이 풀린 탓일까. 유리창 너머 행인들은 꽤 재밌는 헤드뱅잉을 구경했을터. 노곤한 마음에 이제 집에 갈까 싶어질 즈음, 한 줄이 긁혔다
"앤에게 매튜 아저씨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처음 만든 초코 케이크의 점수를 묻는 앤의 눈동자가 반짝거릴 때, 매튜는 백점이라고 말하는 대신 앤에게 케이크를 조금 더 줄수 있는지 묻는다.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희귀한지 그만큼 눈물나게 소중한지 앤은 몰랐겠지만 나는 이제 너무 잘 안다."
나도, 너무 잘 안다. 지쳐보이는 부하직원에게 한낮의 사치을 선사할 줄 아는 사수의 존재가 얼마나 귀한지.
입에서 살살 녹는 육회와 달달한 커피를 마실 때 함께 하고 싶은, 빨강머리앤을 읽으며 생각나는 팀장과 함께 일한다는 건 복이다. 돈벌이라는 전쟁터에서 나의 팀장님은 우리 모두 살아남길 원한다. 그것도 행복하게.
언젠가 일과 사람에 지쳐 좀처럼 어깨가 펴지지 않는 날이 온다면 이 날을 꺼내먹을 생각이다.
고맙습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팀장님 비슷한 사람이 되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