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만세 Feb 12. 2022

나의 일부라고 느껴지는 인생의 음악이 있나요?

부활 : 비와 당신의 이야기

어차피 변하는 거라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강경하게 입장을 표명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랑이야, 아니야?’, ‘영원해, 안 해?’ 따위의 흑백논리로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고등학생 시절. ‘영원할 거 아니면 사랑이라고 말하지도 말라’며, 사랑이란 영원하지 않을 순간의 착각이라고 치부했죠.


이 극단적인 질풍노도의 고등학생을 한방에 나가떨어지게 만든 음악이 있습니다. 저는 이 노래를 고3 때 미술학원에서 처음 들었습니다. 입시 학원이었지만 듣고 싶은 음악을 크게 틀어놓거나 라디오를 들어도 괜찮은 자유로운 분위기였거든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이 곡이 나왔습니다. 연필을 잡은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귀를 기울였어요. 곡의 반 이상이 흘러갔을 무렵일까요. 갑자기 강렬한 사운드가 멈추더니 영롱한 키보드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저는 연필을 든 손을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어요.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손뿐만이 아니에요. 미술학원의 공기도, 시간도, 제 심장도··· 그 순간 모두 멈추고 말았습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이건 진짜 사랑이다. 진짜 사랑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에 질겁을 하고 그 말을 입에 담는 것도 모두 거짓부렁이라고 확신했던 비뚤어진 마음이 어쩌면 그렇게 한순간에 녹아내릴 수 있었을까요.


1982년, 159번 버스를 타고 그녀는 떠나갑니다.
한 소년은 그 버스 뒤에서 울고 있습니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그 소년이 그때 만든 곡입니다.
- 김태원


부활의 <비와 당신의 이야기>

제가 들은 건 부활 8집에 수록된 버전이었고, 15년 만에 밴드와 재결합했다는 이승철 씨의 목소리였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김태원 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첫사랑을 하면서 너무 슬퍼서 이 곡을 썼대요. 고2의 애절한 마음이 꼬일 대로 꼬인 고3의 마음속 무언가를 건드렸던 걸까요.

당시에는 부활이라는 밴드를 몰랐고 김태원이라는 기타리스트도 몰랐지만, 저는 그 길로 이 음반을 사 와서 미술학원에서 주구장창 틀었습니다. 돌아보니 1세대 아이돌의 엄청난 팬이던 제가 밴드 음악에 눈을 뜨게 된 계기였던 것 같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앨범 진짜 모든 곡이 다 좋거든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저는 계속 라디오를 들었고, 사랑을 믿지 않던 저에게도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제 바람과는 달리 그 사랑이 영원하지는 않았어요. 누가 잘못하지 않아도 관계가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알긴 알겠는데,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더군요. 나를 좋아하던 사람이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어요.


이런 마음을 꾹 눌러놓은 채로 멀뚱히 지내던 어느 날 라디오에서 <비와 당신의 이야기>가 흘러나왔습니다. 자정 무렵이었고, 창문에는 잔잔한 빗방울이 맺혀 반짝이고 있었죠. 음악이 끝나자 DJ가 클로징 멘트를 했어요.


“오늘이 끝나기 전, 남은 3분 동안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만 다시 들려드릴게요. 행복한 밤 되세요. 편안한 꿈 꾸시고요. 아침에 일어나면 좋은 일만 있을 거예요.”


그러더니 정말로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이 구간만 다시 나오는 게 아니겠어요? 라디오에서 이런 식으로 음악의 일부만 반복해서 틀어준 건 (제 경험으로는) 처음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이런 일은 없겠죠. 그 마지막 3분 동안 저는 울고 있었지만, 그 밤 제가 느낀 감정은 슬픔보다는 고마움에 가까웠습니다.



인생의 어떤 시기는 음악으로 기억되기도 합니다. 내 세포 어딘가에 자리 잡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음악은 나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 같아요. 미래의 어느 날 우연히 <비와 당신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그때는 오늘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앨범을 오랜만에 꺼내 들으며 고3 때의 나와, 첫사랑과 이별했을 때의 나와, 음악도시를 들으며 위로받았던 나를 추억하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를 말이에요. 여러분에게도 그런 음악이 있나요?





흠, 이거 흥미로운데?라고 느낄 법한 콘텐츠를 격주로 전달하는 흠터레터의 <완전진짜너무진심> 코너를 브런치에도 옮깁니다. 흠터레터를 구독하시면 다른 꼭지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함께 만나볼 수 있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음을 다해 대충 한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