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리의 작업에 이야기를 입히다.
어느 날 언니가 머리를 자르고 돌아왔다. 머리를 정말로 잘라버린 것이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목뿐이었고, 뇌로 가야하는 척수 다발이 끊어진 전깃줄처럼 달랑거리고 있었다.
“안녕” 언니는 나한테 인사했다. 언니의 머리가 없다는 것이 잠깐 놀라웠으나 여전히 언니였으므로 나도 인사했다. “안녕” 언니가 말할 때 시선을 어디에 둘지 그게 가장 불편했다. 언니의 목, 어깨, 가슴을 보고 대화했고 곧 익숙해졌다.
어느 날 언니가 머리에 깃발을 꽂고 돌아왔다. 깃발의 대는 목에 난 척추 구멍에 꼭 맞았다. 바람이 불면 휘날렸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모든 깃발이 그러하듯 중력을 따라 축 늘어졌다. 이제는 언니를 볼 때 깃발을 볼 수 있어 편했다. 언니가 외출하려고 신발을 신었다. “신발 색이랑 깃발 색이랑 안 어울려” 내가 지적해주었고, 언니는 신발을 갈아 신고 나갔다.
어느 날은 언니 방에 들어갔다. 언니를 보고 난 충격을 받았다. 처음에는 언니가 죽은 줄 알았다. 언니는 끈에 묶인 채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천장에 끈을 고정시키고 양쪽 무릎에 각각 허리에 하나 몸통에 하나 양 손 목에 각각 하나씩 끈을 묶은 상태로 그렇게 공중에 쳐져 있었던 것이다. 언니의 목도 깃발도 빨랫줄에 걸린 무겁고 눅눅한 빨래처럼 늘어져 있었다. “언니” 나는 조용히 불렀다. “응” 언니가 느리게 대답했다. 대답을 들으니 가슴이 미어졌다. 나는 한동안 언니를 보다가 그 자리에서 한참을 울었다. 혼자 있을 때에도, 친구들과 있을 때에도 그 광경을 떠올리면 소리를 지르고 싶어진다.
언니는 체스 게임을 시작했다. 언니는 체스 말을 직접 만든다. 체스 말은 특이하게 생겼다. 인간인데 상체 대신 갈비뼈만 있다. 나머지는 보통 사람이랑 똑같다. 언니는 그 말들의 목을 움켜쥐고 여러 움직임을 연구한다. 나는 언니 방에 들어간 날 이후로 언니가 조금은 무서워졌다. 언니는 여전히 나에게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했지만 체스 말을 쥔 언니의 손을 사정없이 때리고 깃발을 뽑고 언니의 머리를 찾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난 멀리서 언니를 지켜볼 뿐이다. 언니는 체크무늬만 보면 체스를 시작한다. 내 체크무늬 남방은 언니의 정교한 가위질에 모두 체스 판으로 변했다.
언니 방바닥에는 만들다 만 체스 말 조각이 굴러다녔다.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머리 형상, 요술 지팡이 같이 생긴 갈비뼈 조각들, 쭉 뻗고 늘씬한 다리들이 걸을 때마다 발에 치였다. 언젠가 체스 말 조립에 열중하던 언니에게, 옷을 만들어 줘보자, 했더니 언니가 고개를 휙 돌리더니 좋은 생각이야, 하고 기쁘게 말했고, 원피스를 만들어 입혔다. 그런데 원피스는 다들 조금씩 짧아서 다리는 다 가렸지만 갈비뼈는 가리지 못했다.
체스 말 조각이 언니 방을 나왔다. 거실 쇼파에 마치 텔레비전을 보듯 갈비뼈가 누워있었고, 부엌에 원피스를 입은 뼈들이 날 빤히 쳐다보았다. 언니가 자는 동안 나는 언니를 꽉 껴안았다. 언니에게는 평소처럼 향긋한 소나무향이 났다.
얼마 전 언니의 머리를 찾았다. 집에 가는 길에 그냥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얼굴이 없었다. 머리카락, 귀, 귀걸이까지도 그대론데 얼굴만은 까만 공백이었다. 하지만 언니인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머리를 품에 안고 집에 몰래 들어왔다. 그리고 머리를 옷에 여러 겹 싸서 지난 계절 옷들이 들어있는 상자에 넣어 옷장 위에 놓았다. 방 밖으로 나가자 언니가 있었다. 언니를 보는 순간 또 깃발을 뽑아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화처럼 밀려왔지만 이를 꿀꺽 삼키고 방으로 들어왔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요즘 언니는 사진을 찍는다. 한 손에 체스 말들을 잡고 여러 포즈를 취하며 자신을 찍는 것이다. 그 사진들은 크게 인화되어서 언니 벽에 붙었다. 사진 속 언니는 알몸이었다. 깃발을 꽃은 인체들 사이의 언니. 나는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삐져나온 갈비뼈를 만지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