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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그림 Nov 16. 2017

천직

보들레르의 <천직>에 대한 오마주

 두 무릎을 땅에 대고 오른손이 왼손보다 멀리, 두 손을 땅에 짚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 측면을 보고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려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무릎이 있는 부분에 검고 진득한 액체가 고여있다. 그 사람의 앞, 그러니까 화면의 오른쪽 끝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다. 물감으로 칠한 자국이 아니라 정말 캔버스에 둥근 구멍이 있는 것이다. 캔버스는 벽 같이 거대하다.


 구멍에서 다리 하나가 빠져 나온다. 그리고 정수리가 튀어 나오더니 손바닥이 팔이, 상체가, 그리고 나머지 다리 하나가 등장한다. 젊은 여자가 번쩍 일어서 무릎에 묻은 흙먼지를 털고,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앞을 본다.

 “안녕하세요.” 몇몇 학생들이 인사한다.

 “어, 오셨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 안녕-하세요.” 나머지 학생들도 제각기 인사한다.

 여자는 네에- 반가워요, 하고 목청을 가다듬더니 오늘은 정지용의 시를 읽어볼까요, 한다.

 “비극의 흰 얼굴을 본 적이 있느냐? 그 손님의 얼굴을 실로 미하니라.” 여자가 눈을 감고 읊는다. 몇몇 학생이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멈춘다. 그리고 숨을 뱉는다.

 “혹은 이 밤에 그가 예의를 갖추지 않고 올 양이면 문밖에서 가벼이 사양하겠다!”한 학생의 목소리가 여자의 낭독에 덧대어져 화음처럼 시구가 울린다.

 여러 시어들이 뱉어지고 조명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한다.

 

 갑자기 신나는 음악이 나온다. 학생 하나가 일어나 몸을 흔들기 시작한다. 손을 위로 쭉 뻗었다가 엉덩이를 씰룩 거리다가, 여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온다. 여자는 씨익 웃더니 빙글 돌고 어깨를 들썩이고 박자에 맞춰 빠른 스텝을 밟는다. 다른 학생이 일어나 허리를 돌리고 또 다른 학생은 골반을 튕기며 뒤로 가볍고 경쾌하게 걷는다. 그러다 이들은 모두 손을 잡고 둥글게 춤을 춘다. 둘 셋이서 짝을지어 추기도 한다. 음악이 멈추고도 춤은 계속된다. 그러다 몇 명은 지쳐 책상에 걸쳐 앉는다.


 “근데 저게 뭐에요?” 누군가 벽을 가리키며 묻는다.

 잘 보니 벽이 아니라 캔버스이다. 한 사람이 두 무릎을 땅에 대고 오른손이 왼손보다 멀리, 두 손을 땅에 짚고 앉아 있다. 표정은 보이지 않고 무릎이 있는 부분에 검은 액체가 늪처럼 고여있다.

 “저게 뭐지?” 누군가 또 묻는다.

 “저 사람은 넘어진 것 같아. 저 물에 미끄러진 거지. 그래서 아파하고 있는 것 같은데?” 누군가 말한다.

 “그런데 저 액체는 무릎 부분에 있잖아. 저건 물이 아니라 피야. 무릎이 쓸려서 피가 난 거야”

 “저 사람은 일어나려는 걸꺼야. 저 구멍으로 나가려는 것 아닐까? 저기 커다란 구멍이 있잖아.” 누군가 구멍을 가리킨다.

 “저 구멍은 뭐지?”

 “그러게, 저 구멍은 뭐지?”

 이들은 여자를 쳐다본다. 여자는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한명이 다가가서 그녀를 툭 친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감은 눈에 바람을 후- 불어본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이들은 다 캔버스 앞에 모인다. 캔버스는 매우 커서 거기 그려진 인물은 실제 사람과 비슷한 크기였다. 누군가가 그림 앞에서 그 인물과 똑 같은 자세를 취한다.

 “어때?” 누군가 묻는다.

 아무 말이 없다. 한동안 모두가 그를 바라본다. 그는 아무 말이 없다. 고개를 숙이고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고 있어 표정도 알 수 없다. 곧이어 이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이게 무슨 냄새지? 모두가 웅성거린다. 뭔가 썩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씁쓸하면서도 역한 냄새이다. 여기! 누군가 소리친다. 앉아 자세를 취하던 사람의 무릎에서 검은 즙이 나오고 있다. 검은 즙은 점점 퍼져간다. 그의 몸도 점점 앉은 자세에서 미끄러져 거의 바닥에 배를 대고 누운 자세가 되었다.

 “이봐, 왜 그러는 거야?” 누군가 묻는다.

 “넘어졌으니까. 땅에 닿았으니까.”

 그는 혓바닥으로 검은 액체를 핥는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바닥에 배를 완전히 붙인다.


 그 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모두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본다. 여자가 구멍에 머리를 집어넣고 있다. 여자의 엉덩이와 한 팔과 두 다리만이 구멍 밖에 나와 있다.

 “저기요.” 한 사람이 여자의 등을 툭툭 친다. 여자가 구멍에서 머리를 꺼낸다.

 “네?”

 “이게 뭔가요?”

 “구멍이요.”

 여자는 구멍에 팔을 쑥 넣는다. 구멍이다.

 “저도 해 봐도 되겠습니까?”

 여자는 자리를 비킨다. 한 사람이 구멍에 팔을 넣는다. “차군.” 그러고는 뺀다.

 누군가는 얼굴을 넣고 와아아아아아- 소리를 지른다. 와아아아-하고 소리가 멀리로 퍼진다.

 누군가는 발가락을 넣고, 누군가는 구멍에 대고 방귀를 뀐다. 누군가는 구멍을 쓰다듬는다. 여자는 이들을 보다가 움찔하기도 하고 눈을 깜박이기도 하고 미소를 짓기도 한다.

 모두의 차례가 끝나고, 누군가 “구멍이군요.” 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구멍이군요.”


 음악이 나온다. 한 사람이 몸을 들썩이기 시작하고, 곧이어 여자도 춤을 춘다. 다리를 들었다가 내리고 고개를 획획 돌리고, 점프를 하였다가 바닥을 굴렀다가. 나머지 사람들도 다들 제각기 춤을 추다 함께 춤을 춘다. 흥성한 웃음이 번진다. 조명은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며 분위기를 돋운다.

 그러다 조명이 꺼진다. 노래가 멎는다.


 몇 초간 침묵이 흐른다. 그러다 내 옆에서부터 박수 소리가 난다. 짝, 짝, 짝, 이었다가 곧 우렁찬 함성소리와 박수갈채가 된다. 몇몇은 일어났다. 몇몇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누구는 눈물을 글썽인다.

 나도 일어나 함께 박수를 친다. 손바닥에 감각은 사라지고 달뜬 극장의 희열뿐이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러해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다. 머리와 몸이 불일치하는 순간들, 말로 나를 달래는데 실패하고 홀린 듯 초조하게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날들이 있다. 완성해 놓고 보면 기이한, 이미지에서 이미지로 써내려간 글들이 있다. 그로테스크하고 소름끼치면서도 그 속에서 잠들고 싶은 꿈들이 있다. 이런 징후들에서 무언가 중요한 것을 직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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