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의 악취가 거품처럼 오후 공기에 녹는다.
10시 반. 시윤은 골목에 숨어 그녀의 방 불이 꺼지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는 지난 이주일 동안 이 시간에 외출을 했다. 시윤은 분주한 밤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녀를 훔쳐보았다. 최소 한 시간은 자리를 비울 것이다. 오늘을 기다렸다. 그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시윤은 민첩한 걸음으로 공동현관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 그녀의 집 앞에 섰다. 익숙한 번호를 누르자 열렸습니다, 하는 기계음과 함께 어둠으로 뻗어있는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윤은 가지고 온 갈색 천 가방을 내려놓았다.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켰다. 탁, 신호탄처럼 흰 백열등이 그녀의 방을 비췄다. 시윤은 침을 삼켰다.
쭈그려 앉아 시윤은 운동화 끈을 풀었다. 옆에서 검정색 하이힐, 카키색 캔버스화, 외출용 슬리퍼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벗겨진 모양이 급하지 않다. 시윤은 낮게 숨을 들이쉬며 그 풍경을 찬찬히 훑었다. 구두 안에 가지런히 놓일 그녀의 하얀 발을 생각했다. 재스민 향기가 나는 듯 했다. 시윤은 나머지 한쪽 끈도 풀어 신발을 벗고 그녀의 방으로 한 발을 디뎠다. 왼쪽 벽에 그녀의 거울이 보인다. 거울 안에 액자 하나가 들어와 있다. 시윤은 침을 삼켰다. 꾹 다문 입술이 떨렸다. 시윤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화장대가 있었다. 흰 테이블 위에는 색색의 립스틱, 섀도우, 로션, 향수, 머리띠, 매니큐어. 다리가 후들거렸다. 사물을 훑는 시윤의 입술이 참는 듯 일그러지더니, 눈을 힘껏 찌푸렸다가, 한순간,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건 현실이다. 시윤은 속삭이는 물건들 어디에, 가장 먼저, 시선을 주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여기는 그녀의 집이다 그녀의 방이다. 그녀가 쓰는 그릇, 숟가락, 젓가락, 그녀의 가방, 그녀의 선글라스, 그녀의 옷, 이불, 책, 공책, 신발, 로션, 샴푸, 린스, 휴지, 면봉, 양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초조했다.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한 시간 후면 돌아올 것이다. 시윤은 갈색 천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팔을 저어 화장대 위의 물건을 가방 안으로 쓸어 담기 시작했다. 그녀의 그릇, 숟가락, 젓가락, 그리고, 흰 조명 아래 반짝이는 물건들은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가방이 묵직해졌다. 시윤은 짐승처럼 가쁜 숨을 내쉬며 방을 성큼성큼 활보했다. 그의 손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사방을 두리번대는 그의 눈은 문득 형광빛을 띄었다.
얼마 후 시윤은 그녀의 침대에 쓰러질 듯 누웠다. 모두 끝이 났다. 시윤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부자가 될 것이다, 나는 부자가 될 것이야, 머릿속은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지직거렸다. 잡음들이 폭발했다. 땀으로 덮힌 상기된 얼굴이 빛 아래에서 주름져 보였다. 시윤은 곧 가방을 짊어지고 그녀의 방을 나왔다.
그녀는 한 시간 뒤에 집에 돌아왔다. 신발장에 들어선 그녀는 낯선 자취를 감각했다. 흙탕물 냄새, 곰팡이 냄새. 그녀는 눈썹을 찡그렸다. 방에 들어간 그녀는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은 제자리였는데 모든 것이 없었다. 그녀는 가만히 서서,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그녀는 침대 맡에 핸드백을 내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벗겨진 매트리스의 결을 쓸었다. 코웃음이 한 차례, 두 차례, 터져 나왔다. 피어오르는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부자다. 나는, 부자가 될 것이다. 나는. 그녀는 뒤로 벌렁 누웠다. 깔깔거리는 소리가 벽에 차갑게 부딪혔다.
시윤은 가방을 거꾸로 엎었다. 크리스마스 선물 보따리처럼 물건들이 끝없이 나왔다. 그녀의 칫솔, 그녀의 커피 잔, 필통, 지갑, 카드, 모자. 그런데, 시윤은 갑자기 행동을 멈췄다. 이상하다. 시윤은 물건들을 하나하나 들고 살폈다. 모가 없는 칫솔, 챙이 없는 모자, 알이 깨진 선글라스, 글자가 없는 책. 시윤은 인상을 찡그리고 가방을 탈탈 털었다. 자잘한 물건들이 비처럼 떨어졌다. 향기가 없는 샴푸, 비닐이 없는 우산, 밑창이 없는 신발, 굽이 없는 구두. 물건은 없고 거대한 그림자만 있었다. 길고 검은 기운이 가방에서 쏟아졌다. 시윤을 덮었다. 기침이 나왔다. 사례에 들린 사람처럼 목을 움켜잡고 켁켁거렸다. 시윤은 바닥을 뒹굴었다. 아랫배가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다리가 쥐가 난 듯 저리고 발가락이 경직되어 시체 같았다. 기침이 멎지 않았다. 달밤의 그림자, 물건들의 그림자, 시윤의 그림자가 한데 겹쳐 시꺼먼 공백을 만들어냈다.
얼마 후, 시윤은 눈을 떴다. 무용한 잡동사니들이 개미떼의 홍수처럼 흩어져 있었다. 시윤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곧추 앉았다.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하얗게 명멸하는 화면과 날카로운 타자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한정판매! 그녀의 손톱깎이’ 시윤은 사이트에 글을 하나씩 올리기 시작했다. ‘이거 진짜 맞나요?’, ‘계좌이체로 입금했어요. 빠른 배송 부탁드립니다.’, ‘말도 안 돼. 그녀의 수건이라니.’, ‘전화로 문의 드려도 되나요?’ 댓글 알림 음이 쉬지 않고 울렸다. 몸의 긴장이 풀렸다. 잘 될 것이다. 잘 되고 있다.
날이 어두워지는 오후, 길거리가 내려다보이는 2층 창가 자리에, 그녀가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다. 그녀 앞에는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앉아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두 자리 뒤 한 자리 오른쪽에 시윤이 있다. 시윤은 검은 뿔테안경을 끼고 책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녀를 훔쳐본다. 그녀의 회갈색 명품 가방이 빛난다. 푸른 돌이 자잘하게 박혀있는 그녀의 귀걸이는 빛난다. 조곤조곤 이야기를 꺼내는 그녀의 달콤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입술은 빛난다. 그녀 앞에 앉은 남자의 넥타이가 빛난다. 남자의 눈빛이 빛난다. 시윤은 다리를 반대로 고쳐 꼰다. 석양이 지는데 그녀에게는 그림자가 없다. 혹은 그녀가 그림자이던가? 남자가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인다. 그녀도 남자에게로 다가간다. 남자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녀는 웃는 듯하다. 나를 사랑하니, 그녀는 웃는다. 남자의 물음이던가, 그녀의 물음이던가, 혹은 시윤의? 미소의 악취가 거품처럼 오후 공기에 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