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전시의 맛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도그림 Feb 20. 2020

틈새의 장소를 탐구하는 전시

가소성전 PLASTIC RUINS


 을지로 골목 깊숙한 곳에 자리한 전시공간 을지로 OF에서 서울시에 있는 시장의 작동원리와 존재방식에 대해 탐구하는 전시 <가소성전>을 연다. 신상(神象)이나 특이한 물건, (유사) 골동품들이 거래되는 시장에 특히 주목하여, 전시는 '오늘날 이러한 시장들은 어떻게 존재하는 걸까?' 질문을 던진다. 박지원, 오제성, 진철규 세 작가는 각각 회화, 영상, 설치 작업을 통해 이 장소의 미감, 이곳을 채우는 물건들, 그 특수한 작동방식을 보여주며 이에 대한 대답을 제시한다.





박지원



 박지원은 을지로 시장을 걸을 때 눈과 귀 피부에 스며드는 온갖 감각들을 캔버스 안에 집약적으로 담았다. 동네의 느낌이 한껏 묻어나는 대상들이 화면에 그려진다. 이발소 홍보 간판으로 변모된 깡통 화분과 그 안에 심겨진 가꿔지지 않은 나무, '중화요리 황금성'이라는 전형적인 이름을 단 배달 오토바이, 길에 자라는 촌스러운 분홍색 꽃, 새파란 플라스틱 의자와 리어카, 70년대 가발 공장에서 쓰였을 법한 마네킹과 꽃무늬 마스크, 치마 걸이에 걸려있는 종이 성화, 조악한 마리아상, 십이간지가 그려진 컵 받침. 이들은 허례의식이나 미화는 고려 사항조차 아니라는 듯, 이곳에서 최적으로 생겨난 것들이자 기능성에 충실한 대상들이다.


이미지 세부

작가는 비비드한 원색과 형광색 유화물감을 쌓아 올려 이들을 그려내고, 색채는 침윤되지 않은 채 각자 요란하게 두드러진다. 또 화면에는 빗물이나 노이즈, 깡통의 긁힌 표면처럼 어떤 흐름과 이물질들이 산재되어있다. 이를 통해 형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시장의 소리와 분위기가 가득 울린다.






오제성


한편 오제성의 영상작업에서는 을지로 시장에서 판매되는 온갖 플라스틱 성물들로 한바탕 우스꽝스럽고 기이한 종교 의식이 벌어진다. 영상 초반, 가꿔지지 않은 들풀과 나무 위로 '신과 신들의 고향'이라는 제목이 B급 감성의 폰트로 떠오른다.



 신성이 머무는 자연공간처럼 강물과 새를 비추던 카메라는 점차 줌 아웃되고 그곳이 청계천-을지로였음이 드러난다. 을지로 시장의 매대와 각종 잡동사니들을 트럭무빙으로 비추던 카메라는 플라스틱 성물들에 주목한다. 저품질의 신상들은 다채로운 조명 속에서 회전하면서 격상과 격하, 우상화와 희화화 사이 어딘가, 모호하고 불확실한 지점에서 오랫동안 번쩍인다. 플라스틱 신들의 광란 파티가 끝난 후 자연과 도시 곳곳에 놓인 성물들은 어떤 깨달음을 가지고 도시를 굽어보는 것 같기도 하고 기능을 상실한 채 죽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이 애매모호하고 어설픈 사이비 신성성에 고개를 기웃거리다 문득, 을지로 신상들의 인상을 농축하면 이런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진철규


 진철규는 요술같은 시장의 모습과 이 시장의 특수한 작동 원리를, 소리와 냄새, 시장에서 구한 실제 물건들로서 전한다. 전시장에 들어가면 할머니 집 옷장에서 날 것 같은 오래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고, 크리스탈, 주사위, 모조퍼, 조명이 들어오는 성물들 같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물건들이 진열되어있다.



 그리고 벽에서 나오는 상인들의 육성은 '이곳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걸까?', '누가 이런 물건을 사는 걸까?' 에 대해 귀띔해준다.

"동묘의 정답은 주인장이 특이하고 물건을 특이한 거 갖다놓으면 사람이 와. 이 장사꾼들끼리 주고받는 게 있어. 결국은 여기 생계는 장사꾼들끼리 돌아가는 것 같애"

"이걸 누가 써가 아니라 세상 사람이 너무 많아서 필요한 사람이 있어"

사운드 설치 중간중간 나오는 요술봉 소리는, 서울의 시장이 일반 상점에서 적용되는 경제논리와는 다른 원리로 흘러가고 유지되는 곳이며 물건이 계속해서 나오는 화수분 같은 마법의 공간임을 부각시킨다.






 이렇게 각각 다른 세 방에서 전시되는 세 작업은 서로 연계되고 공명하며 전시를 풍성하게 한다. 박지원 작가가 회화적으로 담아낸 인상의 단편들이 오제성 작가의 카메라에는 붓질의 가공 없이 담긴다. 그리고 두 작업을 보며 자연스럽게 생기는 의문은 진철규 작가의 사운드 설치 작업에서 일부 해결되기도 한다.


 예술가의 시선으로 한 장소를 탐구하고 기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한 장소와 밀착되어 있고, 지금-그곳을 다시 지각하게 하는 장소특정적 전시는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 <가소성전>은 ‘서울시에 있는 특이한 시장’이라는 장소에 주목해 그 ‘작동원리와 존재방식’이라는 뚜렷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세 작가의 작업으로 각각 다른 각도에서 구체적인 대답을 제시한다. 다른 원리와 속도로 작동하는 이런 독특한 공간이 거대한 도시 틈에서 생명을 잃지 않고 있었다니. 이 도시에서의 삶이 왠지 더 재미있어지는 기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체와 분자의 세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