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브라질 아마존 강 지류, 어딘지 지명도 모르는 이곳에서
모터보트 한 대가 표류하고 있다.
선장과 취재진 4명을 포함해 모두 5명이 타고 있다.
방향을 잡으며 노를 젓는 선장.
그 뒤에 타고 있는 취재진 4명은 기진맥진한 상태다.
모터가 고장 나면서 오도 가도 못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인적이 없는 오지에서 날은 어두워 오고 모기떼들이 극성을 부리며
관광객들에게는 부끄러워 모습을 숨긴다는 악어가 용기를 내 튀어나오지 않을까 극심한 두려움을 느낀다.
... 반나절 전....
특집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브라질로 온 지 몇 주 채.
‘고속도로 건설로 인해 파괴되는 자연과 인간의 삶’
이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밀림 파괴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인디오 부족 취재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코디네이터가 섭외 어려움을 겪으면서 현지에서 즉석으로 찾아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러던 중 도시에서 만나게 된 인디오가 자기 부족이 바로 그 사례에 해당한다며 말을 꺼냈다. 원래 농사를 지었는데 밀림에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농작물이 아닌 물고기를 잡고 있다고 했다. 바로 우리가 원했던 사례였다.
그런데 브라질은 인디오 부족을 취재하려면 부족을 관할하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기부금 형식을 내고 정부가 정해 준 부족에 가서 촬영을 하는 것이기 나라의 법이다.
그런데 우리는 돈이 없다. 시간은 더욱 없었다. 제작비에서 기부금을 충당하기에는 어림도 없다. 직접 접촉을 시도해서 협상을 해보자는 결론을 내리고 무작정 인디오가 산다는 아마존 강 밀림으로 향했다.
정부가 수수료 명목으로 떼어가는 돈이 많아 부족들의 불만이 크다는 말에
직접 섭외에 나서면 서로 윈-윈 할 수도 있겠다 희망을 가지면서 출발했다.
그래서 찾아간 인디오 부족.
비슷비슷한, 하물며 남자나 여자나 아이나 할 것 없이 부모가 같다고 해도 믿을 만큼 비슷하게 닮았다. 그리고 냄새. 처음 맡아본 냄새가 왠지 비위에 거슬렸다.
인디오 부족들도 동양에서 온 취재팀에 대해 경계하는 모습이다.
신기해하며 웃는 아이들도 부모들이 뭐라 하는 소리에 뒷걸음친다..
사정을 설명하자 부족을 대표해 나온 사람은 촬영하려면 부족회의를 거쳐야 한다며 카메라 켤 생각 하지 말고 따라오라고 한다.
따라간 곳은 마을 중앙에 있는 널찍한 열린 공간.
벽은 없고 몇 개의 기둥 위에 비를 피할만한 커다란 지붕이 덮여 있는 게 전부다. 부족회의가 긴급하게 소집됐다.
부족민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평소 부족회의가 열리던 곳인가 보다.
흡사 인민재판 같은 분위기 속에 취재진은 꼼짝없이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얼마 줄 수 있느냐”
부족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대놓고 묻는다.
“우리는 가난한 취재팀이다. 돈을 많이 주기는 힘들다”
협상이 시작됐다
“그래서 얼마까지 줄 수 있단 말이냐?”
“그래서 얼마를 원하고 있단 말이냐?”
팽팽한 신경전.
달랑 4명의 취재팀을 둘러싼 수십 명의 마을 주민들.
동정심을 유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인구 몇 만 명에 불과한 소도시에서 온 취재팀이다.(뭐 방송을 볼 것도 아니니 알게 뭐람)
돈이 없어서 이렇게 직접 찾아와서 취재 요청을 할 수밖에 없게 됐다.
우리가 낼 수 있는 돈은 성의를 표시하는 차원에서 백만 원 정도다. “
통역을 하자 부족 사람들이 수근 대거나 낄낄댄다.
저희들끼리 이런저런 말을 하며 화를 내기까지도 한다.
돈의 액수가 턱 없이 부족했다는 것을 그들의 언어를 듣지 않아도 이해했다.
멀리 타국에 와서 인디오에게 비웃음을 사다니..
부끄러워지기 시작한다.
“절대 안 돼!” 그 돈으로는! “
“그럼 어느 정도를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우리는 각 집마다 텔레비전이 필요하다.”
아.. 기본적인 단위가 달랐던 것이다.
동양에서 온 가난한 취재팀이라는 비웃음을 산채 부족민들은 각기 자리를 떠나고 우리는 부족장에게 애원의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깔끔하게 쫓겨났다.
.
촬영도 하지 못하고 쫓겨난 것도 서글픈데 거기서부터 일이 더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타고 갔던 보트가 말썽을 일으킨 것은 출발한 지 채 30분도 되지 않아서다.
툴툴대던 모터가 순간 꺼지고 더 이상 재작동이 되지 않았다..
고속 보트로 도시 마을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는 단 3시간 정도였지만
노를 저어간다면 상황은 다르다.
더군다나 내일 오후에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비행기도 예약해 놓은 상황인 것이다.
“30년 배를 몰면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선장 아저씨의 그 말이 더 무서웠다.
왜 하필 그 30년 만에 일어난 일이 나와 있을 때 일어나는가.
그때부터 촬영 팀은 모두 다 노 젓기로 사용 가능한 장비를 하나씩 찾아내
배를 젓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보트에서 떨어져 나온 나무판자를 쥐고 힘껏 노를 저었다.
오지 중에 오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고 날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이대로 밤이 찾아오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누구라도 나타나 주길 모두 다 바라는 상황
아니 솔직히 나는 아니다.
나로서는 차라리 추위와 배고픔의 고통은 참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혹시 강도가 되면 어떡하나. 누구라도는 아니다. 우리를 구할 사람을 원한다.
다른 4명은 남자지만 나는 여자다. 그것도 예쁜 여자(미안하다 내 생각이다)
여기서 내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밖에 없다.
날이 어두워졌을 무렵, 위기의식이 더더욱 느껴질 무렵
맞은편에서 소리와 함께 배의 형체가 보인다..
마냥 기뻐하는 취재팀과는 달리 착한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그것부터가 머릿속에 맴돌고 있다. 배가 점점 다가오면서 두려움도 더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상대 배에 탄 사람들이 그물을 이 쪽 배에 던지며 묶으라고 한다.
자신들이 머무는 곳으로 가자는 것이다.
배를 빌려 종종 낚시를 하러 오는 외지인들이라고 소개한 무리는 자신들이 머무는 곳에서 하룻밤 자게 해주겠다고 한다.
사실일까? 끌려갔다 영원히 못 나오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대안이 없다.
그들에게 이끌려 간 곳은 조그만 섬.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섬에 아담하게 집이 지어져 있다.
고기잡이하러 나오면 가끔 머물며 쉬다 가는 집이라 했다.
다행히 그들은 ‘착한 사람들’이었다.
해 주는 밥도 공짜로 얻어먹고 바닥에 대충 수건을 펼치고 자면서 내일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지만 고민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들에겐 모터보트가 있었고 내일 새벽에 우리를 위해 도시 쪽으로 가게 해 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타고 왔던 배보다는 속력이 느려 6시간 정도 걸린다며 새벽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수단. 이렇게라도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내일 저녁 이 지역을 떠나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그 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엄청난 비용은 물론 해외 촬영 계획도 틀어지게 되는 것이다.
프로그램을 무모하게 시작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짧은 제작기간과 준비기간이 밀어붙이기식 제작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경험이 부족했던 것이 가장 큰 문제.
입사 이래 7년 가까이 매일 사건이나 취재하고 다니던 내게 다가온
절호의 기회였다.
특집 다큐를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시켜주는 사람은 없었다.
제작비를 따내면 사정은 달라지겠지라는 생각에 기획안 작성으로 밤을 새웠다.
뭔가를 하기 위해 그렇게 열정적이던 때가 과연 몇 번 있었을까
브라질 아마존 밀림. 언젠가는 꼭 한번 오고 싶었던
그곳에 내 힘으로 내 기획으로 왔다는 사실은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패기에 비해 준비는 부족했던 것이다.
그 열정이 이곳 아마존으로 이끌었는데
나는 지도상 어딘지도 모르는 컴컴한 섬에서 바닥에 뒹굴고 있다.
촬영 기간 내내 훌륭한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나이 서른에 결혼도 못해보고 낯선 오지에서 비명횡사하지 말아야겠다는 일념, 오직 그 일념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를 닦을 생각도 세수할 생각도 없다. 그저 문명으로 돌아가고픈 생각뿐이다.
새벽이 밝아온다. 모터보트는 취재팀을 태우고 전속력으로 달린다.
물이 튀는 것을 막기 위해 검은 비닐봉지를 감싸고 고개를 푹 숙이고 누웠다. 난파선의 모습이 이럴까? 그런 와중에도 악어가 입을 벌린 듯한 형상의 구름이 눈에 들어온다.
돌아간다. 돌아간다. 배를 얻어 탔으니 다행인 것이다. 앞으로 다 잘 될 것이다.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하지만 40일 남짓한 브라질 출장에서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브라질 고속도로를 횡단하면서 강도를 만나고 교통사고가 나서 차가 반파가 되고 한고비 넘기면 한고비가 또 닥치는 상황이 이어졌다. 누구에게나 첫 출장의 기억은 잊지 못할 것이지만 내게는 적도에서 펼쳐진 이 40일 동안의 특집 출장은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기 위한 신고식처럼 인생의 큰 고비로 기억되고 있다.
내 특집이 있고 난 몇 년 뒤 비슷한 내용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방영되는 것을 봤다. 고생을 많이 했다는 것도 영상으로 보여줬다. 프로그램은 인기가 많았다.
무엇보다 부족의 삶을 아주 밀착 취재했다.
영상이나 구성을 보는 것보다 프로그램을 보면서 내내 생각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얼마를 줬을까? 얼마로 협상을 봤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