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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윤 Oct 30. 2022

수련생이 되다.

수퍼비전과 수퍼바이저에 관하여

19년도 2월에 석사를 졸업하고 그해 9월에 한국상담심리학회 2급 전문가 자격을 취득했다. 대학원도 졸업하고 2급 자격증도 취득했는데, 나를 기다리는 건 장밋빛 미래가 아닌 냉정한 현실이었다. 일단 구할 수 있는 일자리가 거의 없었다. 청소년상담복지센터의 팀원으로 취직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루트였는데, 취직을 한다고 해도 상담보다 행정에 치우쳐져 사업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센터마다 다를 수 있다)


나는 상담사이고 상담이 하고 싶었다. 그런데 당황스러운 점은 내가 상담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대학원에서 여러 과목을 수강하고, 수없이 많은 책과 논문을 읽고, 실습을 하고, 논문을 쓰고, 시험을 치렀다. 그런데도 내담자에게 효과적인 상담을 하고 있는지 자신할 수 없었고 혹시나 해를 끼치고 있지는 않은지 불안했다. 분명히 많은 것을 배웠는데 아무것도 배운 게 없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상담사 성장하기 위해서는 상담에 대한 이론적 지식과 실습 경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론과 실습을 연결 짓는 수퍼비전이 필수적이다. 수퍼비전이란 자격을 갖춘 1급 상담사에게 상담 수행에 대해 지도를 받는 것을 말한다. 수퍼비전을 받지 않고 상담 경험만 쌓는 것으로는 전문성 향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현실은 이론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고, 상담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상황에 따라 적절히 구사하기 위해서는 초심자의 시행착오를 지켜봐 주고 지혜로 안내해줄 수퍼바이저가 필요하다.




고민 끝에 나는 수련생이 되기로 결정했다. 대학상담센터 인턴으로 지원했고 선택 기준은 명확했다. 지도받고 싶은 수퍼바이저가 계셨고, 1년에 총 30회 이상으로 가장 많은 횟수의 수퍼비전을 제공해주는 곳이었다. 수련 기관에서 매주 수퍼비전을 받다 보면, 난처한 상황에서 즉각적인 SOS를 칠 수 있고 지도받은 내용을 토대로 전문적으로 개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매주 수퍼비전을 받는 것은 확실히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 문제가 생기면 곧장 달려가 논의할 존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든든했다. 그러나 어떤 수퍼바이저를 만나느냐에 따라 수퍼바이지로서 느끼는 안정감의 정도 차이는 존재했다. 초심자로서 평가의 불안에 얽매이지 않고 진솔해질 수 있는, 함께 안전한 수퍼비전 시간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수퍼바이저를 만나는 건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말과 행동이 있나요?'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수퍼바이저가 여쭤보셨다. 수퍼비전은 수련생이 취약해지는 시간이니, 수퍼바이저로서 미리 알아야 할 사항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하셨다. 지금껏 지도받은 10명 넘는 수퍼바이저 중 이런 질문을 해주신 수퍼바이저는 그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존중받고 이해받는다는 느낌은 사람을 자유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수퍼바이저의 안전한 품 안에서 무장해제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담을 하면서 겪은 감정과 생각을 그 어느 때보다 진솔하게 털어놓았고, 이는 초심 상담사로서 성장의 변곡점이 되었다.


상담사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특정 기법과 이론을 배우는 것도 필요하지만, 상담사 자신의 감정 반응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이를 상담에 활용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때로 상담사의 감정은 내담자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정확하고 빠른 지름길을 제공해준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아 힘들다며 내방한 내담자가 있었다. 호소 문제를 듣고 나니 상담사로서 더욱 주의 깊게 들어야겠다는 의욕이 샘솟았다. 그런데 웬걸. 상담을 시작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내담자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잡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점심을 많이 먹었나?' '맞다. 아까 커피를 안 마셨네!' 온갖 이유를 갖다 붙이며 나의 지루함을 설명하려 했지만 납득되는 것 같기도 하면서 충분히 납득할 수 없는 어중간한 기분이 될 뿐이었다.  


이때 상담사로서 자신이 경험한 '지루함'을 외면하거나 내담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지 못하는 무능한 상담사라고 스스로를 비난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당시 수퍼바이저는 상담 중 내가 경험한 지루함의 원인을 성찰하며 내담자를 이해하는 도구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수퍼비전을 통해 내담자가 상담에서 진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은 채 피상적인 태도 임하고 있었고, 상담사의 지루함은 내담자의 발화 방식과 태도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상담사조차 내담자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어려운데, 그동안 내담자가 관계에서 원하는 것을 얻기 정말 어려웠겠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상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의 '개입'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는 수퍼바이저의 지도 속에서 지속적인 성찰을 통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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