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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윤 Oct 30. 2022

아주 작은 것

변화에 관하여

나라면 내담자를 잘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만만한 기세가 꺾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학윈에 입학하여 상담 실습을 시작하자마자 알았다. 내가 불가능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는 걸. 좌절 경험은 적고 열정은 과다한 초심상담사의 기대가 현실적 일리 없다. 상담으로 내담자가 성장하도록 돕는 것을 - 예를 들면 내담자가 관계에서 자기주장을 하고,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고 적절한 휴식을 취하며, 미루지 않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게 되는 것 등-  동네 뒷산을 오르는 것쯤으로, 조금 땀 흘리면 달성할 수 있는 목표 정도로 여겼다(물론 달성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지만, 시간의 변수를 고려하지 못했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초심자이기 때문에 품을 수 있는 패기와 열정이었다.


열정은 전염된다고 하던가. 초심상담사의 과도한 기대와 조력 욕구는 때로 놀랄만한 상담 성과를 만들 수도 있으나, 대체로 상담자와 내담자 모두에게 독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 상담사 입장에서는 목표와 기대가 높으니 좌절의 연속을 경험하며 소진으로 이어질 수 있다. 초심 때 내가 끙끙 앓던 사례가 있었다. 내가 아니라 더 능력 있는 상담사에게 갔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자책감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그 사례로 수퍼바이저를 찾아갔을 때 '내가 만났어도 힘든 사례'라고 말씀해주셨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내가 부족해서 힘들다고 느끼는 것만은 아니구나 안도했다. 물론 상담사에 따라 숙련도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누구라도 내담자를 빨리 변화시킬 수는 없다. 계속 좌절감을 느낀다면, 상담사로서 자신의 이상을 현실에 맞춰 조정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상담사가 너무 앞서 나간다면 내담자도 상담사가 자신의 어려움을 공감하지 못한다고 느낄 가능성이 높다. 내담자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에 따라 상담사의 개입 방법은 달라져야 한다. 내담자는 무엇이 문제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고, 문제는 인식했으나 변화에 대한 양가감정을 지닐 수도 있으며, 변화를 시도하며 시행착오를 겪어내고 있을 수도 있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보폭에 맞춰 걷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때로는 아주 느리게.


침묵으로 일관하는 내담자를 만났을 때가 기억한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 있어요?'라는 질문으로 상담을 시작하면 곧이어 시작되는 익숙한 침묵이 내 숨을 턱턱 막았다.


상담에서 내담자가 침묵의 대화를 걸어오는 건 흔한 경우이지만, 당시는 초심이었고 이대로 가다간 내담자가 종결하든 내가 도망가든 일이 날 것만 같아 수퍼바이저를 찾아갔다.


"아윤아. 이 내담자는 기다려주는 게 사랑이야."


되돌아보니 언제부터인가 침묵이 길어지기 전에 내가 먼저 질문을 던지곤 했다. 질문을 하지 않으면 50분 내내 고요히 있다가 상담이 끝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이 있었다. 정말 그럴까? 자문했다. 그러자 침묵하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내담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담자도 자신의 방식으로 상담에 '참여'하고 있었다.


침묵을 포함한 내담자의 대처 행동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침묵해야지만 자신을 보호하며 살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간 얼마나 많은 말들을 삼켜왔으면, 마음을 안전하게 털어놓을 수 있도록 설계된 상담에서도 풀어내기 주저할까. 아무리 침묵으로 일관해도 본인의 생각과 감정이 있는 한 존재임을 상기시켰다. 조급함을 내려놓고 침묵을 존중하며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러자 내담자는 자신의 속도대로 변화해나갔다.


때로 변화를 위해 상담자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다. 내담자가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도록 돕는 선에서 상담이 마무리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상담사로서 추구해야 할 것은 작은 변화들이니까.

어떤 중요한 순간은 과대평가되는 반면, 매일의 사소한 진전들은 과소평가되기 쉽다. 흔히 우리는 대단한 행위가 있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1퍼센트의 성장은 눈에 띄지 않는다. 가끔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는 무척 의미 있는 일이다. 특히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지극히 작은 발전은 시간이 흐르면 믿지 못할 만큼 큰 차이로 나타날 수 있다.
- 제임스 클리어, 아주 작은 습관의 힘 中


상담사가 심어둔 작은 씨앗들은 내담자 안에서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아주 작은 변화들을 알아보고 격려하고 기뻐하자. 우리는 모두 그렇게 성장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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