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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윤 Oct 30. 2022

가장 두려운 감정, 무력감

대리 외상에 관하여

'상담 오기 전에 항상 큰 마음을 먹고 들어와요. 화장실 하수구가 머리카락이 많아서 치워야 하는 걸 아는데 보기 싫고 나중에 치우고 싶은 마음이 강해요.'


과거 트라우마 경험과 씨름하고 있는 내담자가 말했다.


'상담에 대한 양가감정이 드는 건 자연스럽고 솔직한 마음이죠. 제대로 바라보고 싶기도 하고 외면하고 싶기도 한 그 마음에 대해 더 이야기 나눠봐요.'


짐짓 의젓하게 대답했지만, 깊은 트라우마 기억이 있는 내담자를 만나 상당한 긴장과 불안을 느꼈다. 내담자가 품고 있는 감정의 깊이를 잘 마주하고 헤아릴 수 있을지 겁이 났다. 내담자는 나보다 더 큰 두려움을 느꼈으리라. 후우. 심호흡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상담에 들어갔다.


트라우마의 핵심은 무력감에 있다. 깜깜한 집 안에 들어가서 불을 켜지 못한다고 상상해보자. 여기가 어디고 내 방이 어디에 있는지 알면서도 약간의 공포를 느끼게 될 것이다. 눈앞에 있는 택배 박스를 보지 못하고 걸려 넘어지는 와중에 식탁 모서리에 찔려 피라도 보면 어떡할 것인가. 혹은 갑자기 누군가가 튀어나와 나를 공격하려고 한다면. 이처럼 어둠 그 자체보다도 내가 나를 방어하기 어렵다는 무력감이 공포를 자극한다. 모든 트라우마 생존자들은 지독한 무력감과 싸운다.


무력감에서 벗어나 통제감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공포스러운 자극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것이다. 트라우마 생존자들은 트라우마 사건이 조금이라도 자극되는 사람, 사물, 사건을 피하게 된다. 당장은 안정감을 느낄 수 있겠지만, 회피로 인해 과거의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따라서 상담자들은 내담자가 트라우마 사건을 직면하고 성찰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사건이 발생한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사건에 대한 기억은 변화할 수 있다. 사건과 연결된 신체 감각, 감정, 사고, 이미지 등 여러 요소가 통합되기 시작하면 트라우마 기억은 점차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이전에는 떠올리지 않았던 사건의 부분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사건이 더욱 생생해지면서 강렬한 정서를 경험하기도 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며 내담자는 자신의 내면세계와 과거 경험의 영향에 대해 학습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치료적 과정은 오랜 시간이 소요되며 내담자에게도 상담자에게도 힘들고 지난한 과정이다. 내담자의 트라우마 사건을 구체적이고 반복적으로 듣는 상담사는 대리적인 외상을 경험할 수도 있다. 대리 외상화는 타인의 외상 경험에 노출됨으로써 자신, 타인, 세상에 대한 인지적 신념의 부정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나 역시 내담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사람들은 이상하고 세상은 안전하지 않은 곳인 것 같다는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내담자의 무력감에 함께 젖어들게 되는 과정이, 초심자로서는 가장 벅찼다. 


상담사가 내담자의 무력감에 같이 끌려가지 않고, 자신과 세상에 대한 적대적 시선을 객관적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는, 내담자에게 대처 자원이 있고, 안전한 세상과 타인 또한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트라우마 내담자로 공개사례발표를 한 적이 있었다. 사례 발표가 끝난 후 10명 남짓한 동료들이 한 명 한 명 나를 다정히 안아주었던 순간의 감각을 잊지 못한다. 그 어떤 말보다 큰 위로가 되었다. 트라우마 내담자를 상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상담사 혼자서 견디지 말자. 동료들에게 지지를 구하자. 마음 안으로 퍼지는 뜨끈한 온기를 간직한 채 내담자의 마음을 비춰주자. 내담자의 세상이 조금 더 안전해질 수 있도록. 


때때로 네가 들려오는 모든 말들이 미움에 가득 찬 말들이겠지만,
세상에는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랑이 있어.
- 찰리 맥커시,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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