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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윤 Oct 30. 2022

상담사도 돌봄이 필요해

자기 이해

대학원에 입학할 무렵만 해도 상담사로서 한 걸음을 내딛게 된 것에 그저 안도했고 감사한 마음으로 가득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나 레지던트로 수련생 생활을 하던 때, 상담이 온전한 일상이 된 어느 날,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지겹다는 말을 습관처럼 했다. 그렇게 소진된 상담사가 되어 있었다.


소진은 한순간에 일어나지 않으며 발생 원인도 환경적 요인, 내담자 요인, 상담사 요인 등 많은 부분이 맞물려 있다. 나의 소진도 꽤 복합적이었다. 우선 행정업무에 한 차례 시달렸고, 실무적으로도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힘들었지만 내가 선택한 일인 만큼 눈앞의 일들을 어떻게든 처리해나가며 버텼다.   

 

그 와중에 사례 난이도가 높아져 내담자들은 스스로 소화하기 어려운 여러 감정들(주로 분노와 불안)을 던졌고 때로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내 마음의 무게에 내담자의 마음의 무게가 더해져 모래주머니를 차고 걷는 기분이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수퍼바이저를 찾아가곤 했는데, 새로운 수퍼바이저a는 나의 실무 역량 향상을 도와주시기 위한 마음으로 상담사로서 보완점을 자주 지적하셨다.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 하시는 마음은 감사했고, 평소의 나라면 열심히 배웠겠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걷지 말고 뛰라는 요구는 가혹하게만 들렸다.


내 마음의 무게를 알아봐 주고 덜어줄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나 평소 큰 힘이 되어주던 동료들도 이미 각자의 과중한 업무로 지쳐있어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친한 동료가 개인적인 사건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되면서, 여러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남은 에너지를 쪼개어 동료를 살피기 위해 애썼다. 동료가 겪어내고 있는 너무나 큰 고통 앞에서 나의 고통은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다. 이 정도 힘든 건 괜찮다고, 스스로를 속여가며 견뎠다.


그 후로도 얼마간 쫓기듯 지내다가 슈퍼비전 시간에 무언가에 홀린 듯 말했다. "내담자들이 저를 가해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가해'라는 단어 선택에서 내가 분노의 소용돌이에 휩싸여있음을 알아차리신 수퍼바이저b는 말하셨다. "너 좀 쉬어야겠다. 네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      


소진은 ‘마음의 출혈’이라고 불리며, 의미의 소진(meaning burnout)과 돌봄의 소진(caring burnout)으로 구분된다. 의미의 소진은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이 더 이상 자신의 삶에서 충분한 의미와 목적을 주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돌봄의 소진은 상담사들이 더 흔하게 경험하는 현상으로, 스트레스 상황이 계속됨에도 외부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한 채 일방적인 돌봄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과정에서 정서적으로 고갈되는 현상을 말한다(Skovholt, 2003).



나의 경우도 돌봄의 소진에 가까웠다. 상담 관계는 기본적으로 상담자가 내담자를 돌보는, 내담자의 욕구가 우선시 되는 관계이다. 내담자는 상담사의 마음을 비추어주는 거울이 되어줄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따라서 상담사는 가족, 주변 동료들, 친구들과 관계에서 주고받음의 균형을 유지하는 게 더욱 중요한데, 그 균형마저 무너져 있었다

  

어쩌면 나를 옭아매고 있는 건 나였다. 내가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이야기하면 기꺼이 귀 기울여줄 사람들 곁에 있다는 걸 안다. 다만 기질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게 태어나, 타인의 욕구와 감정에 반응하도록 전문적인 훈련까지 받아온 탓에, 주변 사람들의 고통이 전달되는 순간들 속에서 내 욕구를 알아차리고 내세우는 게 때로 힘들다.   


극한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나의 취약점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주어진 일을 어떻게 해낼 수 있을지, 내담자와 동료들의 마음은 괜찮은지 살피느라, 가장 중요한 질문을 너무 늦게 했다. 내가 정말 괜찮은지, 누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돌보아주고 있는지, 필요한 거는 없는지..


상담사로서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과 나를 돌보는 것 사이의 균형을 맞춰나가는 건 아마도 평생의 숙제가 될 것이다. 나의 마음을 더 자주 들여다보자고, 힘들수록 나를 더 빠르게 많이 돌보아주자고, 혼자서 채울 수 없는 건 요구하자고, 더 이상 나를 돌봐줄 누군가를 기다리지 말자고, 그게 모두를 위하는 일이라고, 다시 한번 되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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