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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그 남자의 첫 사기행각

by Libra윤희

17년 전 살짝 쌀쌀했던 봄날 우리는 처음 만났다. 검은색 가죽재킷에 포켓이 큰 청바지, 꽤나 고전적으로 빗어 넘긴 머리의 그 남자는 휴지로 연신 콧물을 풀어대며 수줍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감기에 걸려서요..."




사실 소개팅 자리는 내가 아닌 여동생에게 약속된 자리였다. 그런데 소개팅날이 되기 며칠 전 동생은 키 크고 똑똑한 남자 친구가 생기게 되었고, 2년 솔로생활을 청산하고 싶던 내가 그 자리를 대신하기로 했다. 다행히 소개팅남과 나는 나이차이도 4살로 딱 적당했다.


"언니, 소개하는 오빠가 그러는데, 성격도 좋고 미국서 00 대학 나온 똑똑한 오빠래. 외모는 내가 싸이월드 알려줄 테니까 들어가 봐. 사진이 대부분 공개되어 있다던데?"


오호, 그래? 자신 있게 사진을 공개한단 말이지.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클릭클릭. 사진 속의 남자는 인상도 서글서글하고 나와는 다르게 자연스러운 미소를 간직한 사람이었다. 어깨도 듬직한 걸 보면 실물은 훨씬 남자다운 외모를 갖추고 있지 않을까? 어쨌거나 분명 컴퓨터 화면 속의 남자는 나의 이상형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번 소개팅 느낌 좋아!




작은 손수건을 챙겨 나온 그 남자는 땀을 닦으면서도 가죽재킷을 벗지 않았다. 가죽 재킷 때문인지 유난히 좁아 보이는 어깨는 그렇다 치고 화면 속 남자의 반토막만 한 신장.


그 사람이 이 사람이 맞는 건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난 세상에 몇 없는 희귀종이라 남자의 키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건의 전말은 이따 집에 가서 싸이월드로 다시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은 긍정적으로 보자고. 긍정!'


웃을 때 잡히는 남자의 자연스러운 주름과 선해 보이는 인상이 나는 좋았다. 하지만 사진 속 남자와는 매치되지 않는 남자의 목소리는 쉽게 용서가 되지 않았다. 유난히 애교 있고 귀염성 있는 목소리. 내가 상상했던 싸이월드 사진 속 남자와 일치되는 건 얼굴뿐이었다.


차라리 싸이월드를 보지 말고 나왔더라면.

그랬다면 오늘 남자의 미소와 대화내용만 기억에 남았을지도 모른다.



집에 와서 다시 들어가 본 싸이월드.

사진 거의 대부분이 상체만 있다.

전신샷은 달랑 한 장.

나는 며칠 동안 그 남자의 상체만 주야장천 클릭하며 전신을 상상했던 것이었고 그건 실제와 큰 차이를 낳고 만 나만의 상상이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사건의 전말이었다.


이 남자, 신장은 철저하게 비밀로 하고 싶었나 보다.

사기에 가까운 남자의 싸이월드.

네가 의도한 게 정말 이런 거였니?


우연인지 필연일지 모를 우리의 첫 만남은 그렇게 나만의 오해와 확인, 그 남자의 반짝이는 미소만 남긴 채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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