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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을 즐긴다던 남자

by Libra윤희


첫 만남 후, 남자는 아마도 내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줄기차게 오는 남자의 전화, 그리고 줄기차게 들어야 했던 귀여운 목소리. 나는 남자의 키보다 중요한 게 목소리라고 생각하는 특이한 여자라 길어지는 통화가 달갑지 않았다. 며칠 사이 듣기 싫어지는 목소리라니, '이래 가지고는 정식으로 연애는 못하겠다.' 하는 판단이 들었다.


학교 스터디룸에서 열띤 스터디를 진행하고 있던 어느 날 오후, “오늘 휴가를 냈고, 윤희 씨가 공부하는 학교로 데리러 갈 테니 바람 쐬러 가자”는 남자의 전화가 왔다. 당시 나는 대학원 공부로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몰골이 초췌했다. 하지만 나도 제안이 싫지 않았다. 봄은 깊어 가고, 꽃들은 초록 바탕의 도화지를 저마다의 색으로 물들여 가고 있었다. 짧아서 더 치명적인 봄의 유혹에 모른 척 빠져보고 싶었던 그즈음, 바람 쐬자는 그 말이 그냥 좋았다.


소개팅날과 같은 포켓이 큰 청바지에 아직은 이른 것 같은 하늘색 반팔티, 활기차 보이는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교문 앞에서 기다리던 남자. 소개팅 날 가죽 재킷을 벗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통통하게 튀어나온 남자의 뱃살이 신장보다 더 눈에 들어왔다. 짧은 신장, 통통한 배, 애교 있는 목소리, 귀염성 있는 눈웃음. 그 남자는 '듬직'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였다. 하지만 상기된 얼굴에 스치는 그의 맑은 미소만큼은 봄의 향기를 닮았다.

“삼청동 쪽에 자주 가세요? 그쪽에 좋은 와인바가 있는데 같이 가볼까 하고요.”


학교에서 삼청동을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던 나는 무작정 남자를 따라나섰다. 남자는 자꾸 걷기만 하며 자기 얘기를 늘어놓는데 꽤 굽이 있는 구두를 신어서 발이 너무 아팠다. 이 눈치 없는 남자가 얼마나 더 걷자는 건지 슬슬 짜증이 났다.

‘이러다 발이 다 까지겠어. 어디라도 앉을 수 있게만 해준다면 용서해 주리라.’


“와인바가 여기서 멀어요?”

“아, 바로 여기에요.”




해가 저물어가는 풍경이 담겨 있는 큰 통창을 등지고 앉아, 남자는 능숙한 솜씨로 와인을 시켰다. 본인이 시킨 와인에 대한 전문적인 정보도 곁들이며 나에게 술을 권하는 남자. 요약하면 좋은 와인을 시켰다는 말인데, 그런 이야기들이 학생 신분이었던 나에게는 꽤나 근사하게 들렸다. 디캔팅이며 바디, 밸런스, 와인 레이블 읽는 법 그리고 여러 가지 와인의 포도 품종까지 소개하던 그는 와인 코르크를 건네며 향기도 맡아보라고 했다.

분위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술이 약한 나는 와인 한 잔으로도 달아올랐다. 봄의 꽃 향기만큼이나 향긋한 와인과 남자의 거짓 없는 미소는 묘하게 마리아주(mariage)되며 생각보다 근사한 장면을 만들었다.

회사에서도 와인 동아리에 속해 있다는 그 남자 역시 와인 한잔으로 충분했던 것 같다. 내가 취해서였을까, 한 참 이야기를 듣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남자의 얼굴이 거의 와인빛으로 변해있다. 엄청 달아오른 얼굴은 곧 폭발할 듯 보인다. 아무래도 이 남자, 술이 많이 약한 것 같다. 여자보다 더 취하면 서로에게 좋을 것이 없는 상황이라 성급히 마무리 짓는 남자의 마음이 느껴졌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남자, 알코올 해독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이라 맥주 한 잔으로도 소주 1병 이상 마신 얼굴을 연출할 수 있다. 내가 봤던 와인빛 얼굴은 내가 취해서 그렇게 느꼈던 것이 아니었다.

와인은 생각보다 도수가 높은 술이라, 한두 잔이 더해가면서 붉은빛이 심해져 검붉은 와인색이 되었던 거고, 이러다 정말 폭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부를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졌던 것이 맞았다.



취미가 와인 즐기기라는 와인빛 얼굴의 그 남자. 와인을 즐기지만 알코올 해독 능력이 떨어지는 앞뒤가 안 맞는 남자. 결혼 후 남편과 분위기 있게 술을 마셔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근사한 와인바는커녕, 집에서 던 밖에서 던 남편은 술자리 자체를 즐기지 못하는 남자다. 남편은 술을 싫어하는 사람이기 전에 술이 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술자리에서 쉽에 딥슬립에 빠지는 남편은 미래의 장인어른과 처음 만나는 술자리에서도 잠을 참지 못했던 남자다.


그런 사람이 와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늘어놓으며 나와의 첫 봄나들이를 채워놓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스러운 상황은 아니다. 거쳐야 하는 제일 난코스의 관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굳이 나에게 술이 약한 남자라는 느낌을 주기는 싫었을 텐데, 약점부터 공개하는 스타일이었던 걸까.




와인바에서 나와 집에 돌아가는 길, 우리의 관계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하지만 술 때문인지 봄 때문인지 만남 때문인지, 우리 둘의 마음도 얼굴만큼이나 발그레하게 붉어졌다.


지금보다 많이 어렸던 대학원생은, 술은 많이 약하지만 와인 즐기는 게 취미라며 본인을 어필하는 남자와의 다음 만남이 조금은 궁금해졌다.

“이 남자 지금 노력하고 있잖아? 근사한 와인까지 사면서 말이야.
눈치도 없고 목소리도 별로지만 뭔가 순수했다. 오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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