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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달콤하지 않아도

확실하게 해 주세요.

by Libra윤희

몇 주가 지났을까, 가능한 날은 최대한 시간을 쪼개 나를 만나러 오는 남자는 아직도 나에게 사귀자는 말을 안 한다. 더딘 스타트에 슬슬 지루하다. 온몸과 조심스러운 언어로 관심을 표현하는 남자의 태도가 거짓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확신을 주지 않는다면 나도 더 이상의 시간낭비는 필요 없었다.


'설마 내가 먼저 사귀자고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늦은 저녁 학교가 끝나고 귀가하는 길에 전화가 왔다. 회사가 지금 끝나서 내가 사는 아파트로 잠깐 얼굴 보러 오겠다는 남자. 오늘은 우리 관계에 어떠한 형태로 든 일단락이 필요하다.



그즈음 나는 솔로 탈출을 목표로, 주변 지인들에게 좋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 말을 뿌리고 다녔고, 남자와의 소개팅 후에도 몇 차례 다른 소개팅 자리에 나갔었다. 지금의 남편과 이어질 운명이었던 것인지, 그즈음 소개팅에 나오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결격사유를 가지고 있었다. 스펙은 좋은데 매너 없는 남자, 외모는 출중한데 살아온 환경이 나와 너무 다른 남자, 대화가 유치해서 함께하기 10분도 아까운 남자, 심지어 나는 좋은데 그 사람은 시큰둥한 만남까지.


와인빛 그 남자가 “사귀자”는 말을 직접 뱉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마음의 빚’ 없이 모든 약속을 계획대로 진행시켰다. 남자에겐 모든 소개팅을 마다할 만큼 치명적인 매력도 없었다.

오늘은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다. 남자의 마음을 알면서 계속 소개팅 자리에 나가는 것도 개운한 기분은 아니었다. 이 정도도 속 시원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남자와 만남을 이어간다는 것도 내 스타일은 아니다. 다 관두고 이런 미적지근한 남자와는 사귀고 싶지 않다.




레이스처럼 초록을 수놓았던 꽃들이 거짓말인 듯 사라진 늦봄의 저녁. 그날 숙제가 많았던 탓에 아파트 놀이터 밖으로는 이동반경을 확대할 수 없었다. 느긋한 마음으로 놀이터로 향하는 언덕을 오르는 남자와는 다르게 나는 빨리 결정할 것 결정하고, 할 얘기 있으면 하고, 들어가서 컴퓨터자판과 한 판 씨름을 치러야 하는 처지였다. 놀이터 의자에 앉아 나누는 이런저런 얘기도 재미없고 무의미하게 느껴지던 순간, 아는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 저번에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했잖아. 마침 나 아는 오빠가 호주에 있다가 완전 귀국했는데 언니 생각이 나서. 언니 아직 솔로지? 아직 솔로면 한 번 만나볼래? 되게 재밌고 괜찮은 오빠야.”

일단 지금 일이 있다며 전화를 끊고 시간에 쫓겨 다소 딱딱하게 남자에게 물었다.


“지금 아는 동생이 소개팅하겠냐고 전화 왔는데, 저 소개팅 나가도 돼요? 오빠 의견도 듣고 싶어서요.”


남자는 처음으로 자연스럽지 못하게 웃었다. 어색한 웃음과 함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뭇 거리며 손을 꼼지락 거리며 앉아있던 남자는 결심을 한 듯 몸을 늘려 어깨를 폈다.


소개팅 안 돼요. 지금 전화해서 남자친구 생겼다고 하세요.
내일 학교 가서도 그렇게 말하구.


남자의 급발진.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밝히라는 말을 하면서 조금 어이없다는 얼굴이다. 몇 주 동안 시간을 쪼개서 만나러 오고 나름 데이트도 몇 차례 있었는데, 충분히 호감을 표현했는데, 친구의 전화에 내가 보인 반응이 약간은 서운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도 살짝 당황했다. 정성스럽게 시간 쪼개서 만난 건 사실이지만 우리 사이는 점선처럼 이어져 있었을 뿐 직선이 되지 못했다. 직선이 되기 위해 필요한 한 점, 시작이라는 그 점이 없었다. 대충 이어 붙이려는 심산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나도 몰래 흐릿하게 시작점을 그리고 있었던 것 같다. 학교 가서 남자친구 있다고 말하라는 남자의 말이 싫지 않았다.

'내일 나 남자친구 생겼다고 누구누구한테 말하지?'


남자의 그 말에 나는 마음속의 흐릿한 시작점이 보이지 않게, 더 진한 색으로 덧칠을 했다.

"그럼 오빠 말대로 내일부터는 남자친구 있다고 할게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내가 그때 시간이 없어서 상당히 박력 있게 밀어붙인 것 같다. 마치 내가 시작점을 찍은 것 같은 느낌이다. 누군가 그게 맞다고 해도 아무 상관없을 만큼 긴 시간과 사건이 있었다. 우린 이미 같은 직선 위에서 17년을 함께했으니 시작을 누가 했든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확실한 건, 계속되었던 실망적인 소개팅, 나에게 촉박했던 그날의 시간, 아는 동생의 기막힌 전화 타이밍 이 모든 우연이 모여 필연이 되었고 그렇게 시작점이 그려졌다. 그날이 없었으면 나의 또 다른 소개팅이 계속되었을 것이고, 남자의 스타트는 여전히 지루했을 것이고, 어떤 우연이 또 다른 만남을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 <광식이 동생 광태>

마음에 둔 여성이 있는 남성분들에게

여자는 직감만 가지곤 움직이지 않아요.
확실하게 시작점을 찍어주세요.
당신이 원하는 색으로
원하는 형태로.


그게 더 멋있으니까.
그게 더 섹시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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