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반 지호가 쉬는 시간에 문틈으로 빼꼼 머리만 들이민 채 나를 부른다. 조금 머뭇 거리며 제 손톱만 만지작 거리던 지호는 결심이 선 듯 나를 바라봤다.
“어제 은경이랑 학원 끝나고 얘기하다가 니 얘기가 나왔는데 은경이가 너 때문에 기분 나쁘다고, 니 흉을 보는 거야. 근데 나는 이 얘기를 너한테 꼭 해야 할 것 같아서 왔어.”
초등 5학년 때부터 고등학생이 된 그때까지 한동네 살던 은경이는 나와 절친이었다. 우리는 학교 수업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끝 모르게 수다를 떨었고, 그래도 남은 이야기는 이따 다시 하자며 집 근처 놀이터에서 만날 약속 시간을 정하곤 했다. 학원이 끝난 후에도 학원 독서실에 남아서 '공부 반, 장난 반'으로 시간을 보낸 후에야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들 만큼, 우리는 나눌 이야기가 많았다.
그렇게 속 이야기까지 다 털어놓으며 서로의 비밀까지 꾹꾹 담아 ‘넌 내 거야’를 약속하던 내 친구 은경이가 내 흉을 보다니. 난 순간 멍하고 어지러운 기분에 손발 끝이 빠르게 식어가는 느낌이었다.
“왜? 왜 나 때문에 기분이 나쁘대?”
안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의 끝에 서운함과 불안함이 꼬리처럼 붙어 축 처져버렸다.
“은경이가 그러는데, 너는 공부해서 힘들고 피곤해도 절대 그런 내색을 안 한대. 공부를 안 하는 척하는 것 같다고, 자기한테 솔직하지 못한 것 같다고 기분 나쁘다고 그러던데?
근데 너랑 제일 친한 은경이가 니 흉보는 거 어떻게 생각해? 난 은경이가 니 욕하는 게 이해가 안 되더라? 그리고 난 네가 공부 안 하는 척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
심장이 바들바들 떨려 그 진동이 손까지 전해졌다. 수업 시작 종소리에 놀라 교실로 돌아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난 뭘 해도 힘든 내색을 안 한 것이 맞는 것 같았다. 엄마, 아빠가 응석을 잘 받아주지 않으셔서 그런지는 몰라도 힘든 내색, 피곤한 내색은 고등학교 시절의 나에겐 사치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새벽잠, 밤잠 줄여가며 그렇게 힘들게 하는 공부도 아니었기에 힘들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나의 모습이 친구에게 가식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경이는 늘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하는 친구였으니까.
난 다음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지호를 찾아갔다.
“지호야, 내가 생각해 봤는데, 은경이가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난 괜찮으니까 너도 신경 쓰지 마. 그리고.... 다음엔 은경이가 내 흉봐도 나한테 알려주지 마. 네가 알려줘도 난 괜찮을 거니까 안 알려줘도 돼.”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던 그때의 내 모습이 지금도 좋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지호의 태도가 분명 부당하다고 느꼈고 그 마음을 말로 전했기 때문에, 그때의 나는 충분히 멋있었다.
지호는 정말 나를 걱정해서 경고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나와 은경이 사이를 질투해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다. 아마 은경이도 지호랑 더 가깝게 지내고 싶어서 나에 대한 불만을 비밀인양 털어놓았을 수도 있다. 그런 비밀은 보이지 않는 덫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나의 판단은 옳았다. 제3자의 이야기 때문에 서로의 신뢰가 흔들리고 싶지 않았던 여고생의 결심은 충분히 표현되는 것이 맞았다.
나라고 뒷담화를 질색하며 피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 면전에 대고 차마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팩트 체크하며 정보 나누고 위로받고 싶은 그 마음을 이해한다. 타인에 관한 나쁜 소문을 타산지석으로 삼고 자신의 행동을 뒤돌아 보는 순기능도 있다고 하니 뒷담화도 일장일단이 있는 녀석이다.
오늘의 뒷담화가 영 꺼림칙하면 동조하지 않으면 되고, 내가 동조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티 나게 표현할 수도 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려면 반대로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말하면서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간질은 분명 더 시커먼 속내가 있는 것이기에, 나는 항상 이간질하는 사람을 경계한다. 이간질을 통해 편 가르기를 하고 자신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기분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 가장 소름 끼치고 무섭다. 그 사람은 지금 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지만 언제든 지독한 방식으로 나를 등질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잘 알기에, 조금의 망설임 없이 거리 두기를 시작한다.
출처: canva
학부모 모임에 나가거나 동네 엄마들 모임에 나가면 꼭 그 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 이야기를 꺼내며 대화의 주도권을 흔드는 사람이 있다. 간혹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올 때도 있고, 놀라운 진실이 등장할 때도 있다. 물론 그 자리를 떠나고 싶어지게 하는 선 넘은 이야기들도 있다.
하지만 소소한 뒷담화가 없는 모임은 사실 거의 없다. 엄마들이 육아를 하며 생기는 불안과 스트레스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날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그것들을 털어놓고 가벼워지고 싶어서 나온다. 함께 이야기 나누며 '나도 불안해, 나도 힘들어, 너도 그렇지? 내 맘 이해하지?' 그렇게 흔들리는 서로를 잡아주기 위해 만난다. 이간질이 아닌 뒷담화까지는 내가 컨트롤할 수 있다. 나 또한 비겁하고 정보에 목말라 불안한 누구누구 엄마이기에, 친목다지기 혹은 사회생활이란 명목아래 묵묵히 귀만 열고 분위기를 타 본다.
일단 서막은 대부분 질문으로 열린다. 이건 절대 순정의 질문이 아니라는 점이 핵심이다.
“혹시 OO이 알아? 왜 저번에 축구 같이 했던 걔. 3반이라던데... 걔 어떤 애야?”
“OO이 엄마 혹시 어떤 사람인지 알아? 왜~ 저번 총회 때 보라색 스커트 입고 왔던 사람. 기억 안 나?”
"저번에 브런치 먹을 때 OO엄마가 한 얘기 어떻게 생각해?"
(자!! 준비되었는가? 오늘! 여기! 이 자리에서! 나와 함께 그 사람에 관한 뒷담화 시작할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