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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bra윤희 Mar 26. 2024

하늘나라에선 필요 없을 거예요

할아버지의 박카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외할아버지는 가족들이 싫어하는 고집불통에 괴팍한 사람이셨다.


 신문의 사건사고란에 늘 빨간 색연필로 줄을 그어 두시고, 시도 때도 없이 초콜릿과 박카스를 드시며, 언젠가는 전쟁이 날 거라며 여러 종류의 가방을 준비하시던 할아버지의 굽은 등을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누가 뭐라고 흉을 봐도, 나에게는 한없이 따스하고, 다정한 분이셨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수십 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편의점과 약국에서 판매되고 있는 박카스를 볼 때마다, 할아버지의 그 굽은 등이 떠오른다.   

   



 외할아버지 댁에 가면 대문 앞에 큰 개 뽀삐가 있었다. 뽀삐는 눈이 털에 덮여있는 삽살개였는데, 덩치가 7살 정도였던 나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눈앞의 털 때문에 자주 오는 나를 못 알아보는 건지, 갈 때마다 목청껏 짖어대며 위협을 하는 뽀삐를 피해 나와 동생은 꼭 반대쪽 꽃밭으로 넘어가 현관으로 향하곤 했다.


“할아버지, 뽀삐 좀 다른데 매 놓으면 안 돼요? 너무 무서운데...”

“아니야, 뽀삐가 잘하는 거지. 주인 외에 다른 사람한테는 그렇게 짖는 게 맞아. 아주 똑똑한 놈이지.”


 할아버지는 잠깐이지만 늠름한 군인이 된 것처럼, 허리를 세우고 뽀삐의 과격한 행동을 칭찬하곤 하셨다. 할아버지는 그러다가도 얼른 일어나 안방으로 가시며 나보고 따라오라 손짓하신다. 난 그 손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 잘 알기에, 무서운 뽀삐는 완전히 잊은 채 얼른 할아버지를 따라 방으로 쏙 들어간다.


할아버지 방의 자개장 안에는 늘 자리하는 세 가지가 있다. 


초콜릿, 동전이 가득한 통 그리고 박카스.


 여기서부터는 늘 똑같은 할아버지의 루틴이다. 이 루틴이 시작되면 나도 할아버지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신명이 나기 시작한다. 할아버지는 장군님이고 나는 명령을 받드는 졸병이 된 느낌이었다. 작고 신나는 졸병.


 할아버지는 초콜릿과 동전을 주시며 먹고 싶은 까까 사 오라고 하신다. 뽀삐라는 무서운 관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만, 난 동생의 손을 잡고 씩씩하게 꽃밭을 통과해 집 앞 구멍가게로 향한다. 남은 동전은 꼭 잘 가지고 있다가 할아버지에게 드려야 한다. 할아버지는 내가 남긴 잔돈을 받아 들고 본인 코를 내 코에 외국인 인사처럼 쓱 한번 대시고는 잔돈을 나에게 다시 주신다.

“잔돈 잘 받아 왔으니까, 할아버지가 용돈 주는 거야.”

할아버지는 늘 같은 패턴으로 용돈을 주시기 때문에 과자를 많이 사도 좋고 과자를 많이 못 사도 좋았다. 


“윤희야, 어디 가서 니가 잘할 수 있는 거 절대 먼저 말하면 안 돼, 그럼 죽을 수도 있거든. 6.25 때 할아버지가 군대에 있었잖아. 달리기 잘하는 놈들 손들어 보라고 해서 몇 명이 손을 들었거든, 근데 결국 걔네가 맨 앞에 서서 뛰다가 다 지뢰에 터져서 죽고 그랬어. 할아버지 말 꼭 명심해야 한다.”     


 내 손을 꼭 붙들고 부리부리 큰 눈으로 간곡하게 당부하던 할아버지가, 나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그 말씀과 눈빛은 그냥 손녀가 너무 걱정되어하는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다른 어른들은 애한테 못하는 말이 없다며, 할아버지가 전쟁 때 고생을 많이 하셔서 저런 소리를 한다며, 그냥 못 들은 걸로 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무리 어른들이 나와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지우려 애써도, 아직까지도 난 할아버지의 수많은 전쟁이야기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릴 때는 이상하지 않아서 애써 이해하려 한 적도 없었지만, 고등학생이 되면서 전쟁의 기억들이 할아버지를 아프게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경직되어 있는 초조한 모습, 작은 스트레스에도 초콜릿을 찾고, 수시로 커피와 박카스를 드시는 할아버지의 습관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사람이 전쟁, 고문, 자연재해, 사고 등의 심각한 사건을 경험한 후 그 사건에 공포감을 느끼고 사건 후에도 계속적인 재경험을 통해 고통을 느끼며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에너지를 소비하게 되는 질환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전쟁의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다들 모른 척하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치부하는 바람에 할아버지는 한 번도 마음을 치료받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심지어 할아버지 본인도 자신이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치료를 선택하지 못하고 고통 속에 돌아가셨다. 외상 후스트레스라는 단어조차 없었던 수 십 년 전에, 그 누구도 할아버지의 마음을 달래줄 방법을 몰랐다. 자신도 모르고 타인도 모르게 무한 반복되는 고통의 기억 속에 얼마나 괴로웠을지, 불현듯 찾아오는 상실의 슬픔 속에 얼마나 무서웠을지, 지금 와서 생각하면  가슴이 꼭 막힌다.  

    

사진출처:canva


 엄마랑 할아버지 댁을 방문할 때는 어김없이 약국에 들러서 파란색 박카스 한 상자를 사갔다. 박카스 한 상자가 어린 나에게 무거웠지만, 꼭 내가 들고 할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갔다. 박카스를 볼 때마다 한 모금이 궁금해서 왔다 갔다 하는 나를 보고, 할아버지는 박카스 뚜껑에 조르륵 노란색 박카스를 따라주셨다. 엄마한테는 말하지 마라시 던 그 눈빛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때만큼은 불안하고 초조해 보이지 않았던 따스했던 할아버지의 눈빛이 그립다.      

출처: 네이버 이미지

 며칠 전에 남편이 누가 줬다면서 박카스 세병을 집에 가져왔다.

“요즘도 누가 박카스를 마시나? 카페인 있다고 안 마시지 않아?”     


 밤잠을 못 이뤄 낮에는 카페인의 도움이 꼭 필요했던, 할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셨던 박카스가 없어지지 않고 계속 판매되면 좋겠다. 할아버지가 드시던 박카스와는 조금은 다른 모습의 새로운 박카스지만, 맛은 수십 년 전과 똑같다. 그래서 나는 가끔, 비타 500 옆의 박카스를 사서 뚜껑에 조르륵 따라 마셔본다.    



- 대문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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