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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bra윤희 Mar 19. 2024

낯선 남자의 향기에 흔들린 대가

 “어후, 니 방에서 이게 무슨 냄새니? 엄마는 중학교 때 냄새나는 남자 애들이 제일 싫었어. 못생긴 것보다 더러운 애들이 더 싫고, 냄새 지독한 애들이 제일 싫었어.”

 “그 냄새난다는 얘기 좀 그만해. 엄마가 유난히 민감한 거라고. 그리고 다들 이 정도는 냄새나거든!”

나는 가끔 못 참고 아들에게 잔소리를 하며 신발 신고 학교 가는 아들 뒷모습에 내가 가진 향수를 칙칙 뿌려댄다.

‘지금은 짜증 내고 나가도 학교에서 좋은 향을 만나면, 지도 기분이 좋을걸?’하고 내 멋대로 생각한다.   

  

일상에 지쳐서 잊고 있었지만, 나는 향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맞다.




 20여 년 전이었던, 대학교 2학년 때 약속이 있어서 신촌로터리를 걷고 있었는데, 몇몇 사람들이 책상 두세 개를 붙여놓고 영화인의 미래를 위한 서명에 동참하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호소하고 있었다. 사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단순히 서명에 동참하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성이 내게 다가왔다.


 그 남자는 하얀 셔츠에 남색 조끼를 입어서 꽤나 단정하게 보였고 잘생긴 건 아니었지만 눈웃음을 치는 호감형의 인상이었다. 남자는 내게 다가와서 클립보드에 끼워진 종이를 보여주며 말했다.

“영화계에 종사하는 분들이 좀 더 자유롭게 예술 활동을 할 수 있게 지지해 주시는 분들의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여기 연락처랑 이름, 주소, 계좌번호를 써주시면 영화시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티켓도 보내드려요.”


 그런데 이 남자, 종이를 보여줄 때부터 뭔지 모를 근사한 향기를 뿜어대며 자꾸 나의 코를 자극한다. 멀리서 봤을 때는 나와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을 것 같았는데, 묵직하면서도 세련된 향이 남자를 감싸고 있어 점잖아 보였고, 그 갭차이에서 오는 언발란스함에 취하고 말았다. 잠깐이지만,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이 향취가 끝나버릴 것 같아, 고개를 숙인 채 그 남자의 손을 따라 글을 읽는 척했다. 계속되는 그 남자의 이런저런 설명의 끝에 피어나는 향기 때문에 들은 내용이 자꾸 삭제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남자의 향기에 이끌려, 남자가 원하는 모든 것을 내어주고 말았다. 이름, 주소, 연락처, 계좌번호까지. 추가로 체크하라는 곳에 순순히 체크를 마쳤다. 더 원하는 것이 있다면 주고 싶은데, 그렇다면 좀 더 함께 있을 수 있을 텐데, 남자가 원하는 것은 딱 그 정도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에게는 혼자만의 숙제가 생겼다.


‘도대체, 그 남자에게 느꼈던 그 향은 어떤 향수의 향기였을까?’


 매일 학교가 끝나면 화장품과 향수를 판매하는 곳에 가서 향수 뚜껑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문제는 그런 곳에 가면 온갖 화장품과 향수들이 개성을 뽐내며 향기를 뿜뿜하고 있는 터에, 코가 쉽게 피로해진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가늠할 수 있는 향수는 몇 개 되지 않았다. 몇 개월의 사투 끝에, 100프로는 아니지만, 그 남자의 향수는 ‘불가리 포 맨’ 일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무 향 같으면서도 무겁지 않게 퍼지는 파우더 같은 느낌의 그 향을, 그런 종류의 향수를 아직도 좋아하고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향수의 정체를 찾다 보니 어느새 ‘향수’라는 것 자체를 좋아하게 되었고, 한 개 두 개 구매를 시작했다. 용돈만 모이면 향수가 사고 싶었다. 인터넷 향수 카페에 열심히 검색한 후, 핫 하다는 향수를 모두 적어두었다가 매장으로 달려가 시향 했다.


 아무리 인기가 좋고 비싼 향수라도 시향을 해보면 상상과 딴판인 경우가 허다했다. 99.9%의 사람들이 좋다고 극찬해도 나에게 그 향이 주는 묘한 기억의 꼬리가 좋지 않으면 매력적으로 느껴질 리가 없다. 아무리 허접한 비누라도 그 향을 맡을 때마다 엄마가 작은 나의 손을 씻겨주던 장면이 떠오른다면 그 향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엄마가 사랑을 담아 아픈 엉덩이에 팡팡 두들겨주던, 베이비파우더 향의 '쁘띠마망'향수가 한 때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은 향기가 선물하는 추억여행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화 "러브액추얼리"의 유명한 장면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며칠 후, 하필이면 ‘러브액추얼리’라는 영화를 혼자 보러 간 적이 있다.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 근처에서 계속 머물던 향기만큼은 정확히 기억한다. 아직도 그 향수를 판매하는 것인지, 요즘도 가끔 낯선 사람에게 그 향기를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도미노처럼 ‘러브액추얼리’의 장면이 떠오르고 음악이 흐르고, 영화관의 분위기가 떠오른다. 한순간에 나는 대학생이 되고 혼자 외롭게 영화를 보며 영화 속 해피엔딩 커플을 미워했던 그 감정이 기억난다. 향기는 나에게 과거로 향하는 타임머신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나는 요즘도 약속이 생기면 나가기 전에 꼭 향수를 뿌린다.     




 ‘불가리’ 향수의 그 남자를 잊은 지 1년 반 정도 되었을 때, 나는 은행에 갔다가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그 남자는, 아니 그 ‘영화인을 위한 서명단’들은 내 계좌에서 매달 5천 원씩 지원금을 받아가고 있었다. 눈곱보다도 작은 체크박스 옆에 아마 자동이체라는 내용이 있었나 보다. 5천 원씩 1년 반이면 9만 원.... 9만 원은 그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에게 거의 90만 원에 가까운 충격이었다. 잠시 황홀했던 향기의 대가치고는 좀 비싼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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