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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bra윤희 Sep 10. 2024

라일락, 우정의 시작

다정함에 관한 이야기1

 큰아들 유치원 다니던 10년 전인 것 같다. 둘째를 임신하고 심한 입덧으로 늘 불쾌한 얼굴을 하고 돌아다니던 시절이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고 누워있다가 큰 아이 하원 시간에 맞춰 꾸역꾸역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늘 그 시간에 나오던 같은 유치원 여자아이의 엄마 얼굴도 밝지 않다.

      

“컨디션 안 좋아 보이는데, 어디 아프세요?”

내 질문에 조심스럽지만 씩씩한 목소리로 답한다. 

“저.. 지금 둘째 임신했는데, 속이 너무 안 좋아요. 지금 두 달 정도 됐어요. 좀 안정기에 접어들 때까지 입조심하고 있었어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느껴졌던 동지애? 전우애? 그 감정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늘 얼굴 마주치면 눈웃음만 나누던 분이었지만 당장이라도 가서 부둥켜안고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마 울거나 안을 수는 없고, 나도 모르는 사이 무릎을 그쪽으로 향한 채 바짝 다가앉았다. 


 “저도요, 저도 지금 둘째 임신 중인데, 너무 구역질이 심해서 아무것도 못 먹고 있어요. 예정일이 언제예요? 입덧이 언제쯤 끝날까요?”     


 이야기 끝에 우린, 동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갑자기 전생에서 너무 친하게 지냈던 사람을 현생에서 다시 만난 것처럼, 순식간에 마음이 전해지는 듯 친구와의 대화에 정신이 쏙 빨려 들어갔다. 어딘가에서 라일락 향기가 실려 오던 이른 여름, 오후 3시경, 그 버스대기소에서, 누군가 ‘댕~’하고 종을 울린 듯, 향기로운 운명처럼 그 친구를 알아가게 되었다.  




 그 후로 우리는 급격히 친해졌다. 나와는 정반대로 호탕하고 꾸밈없는 성격을 지닌 친구지만, 서로 비슷한 상식선과 감수성을 지녔다는 걸 차츰 알게 됐다.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싶은 둘이었지만, 이야기의 끝에는 늘 웃음이 가득했고 서로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다정함을, 분명 우린 느끼고 있었다. 임신 기간 내내 함께 임산부 요가 교실도 다니고, 종종 서로를 집에 초대해 배를 볼록 내민 채 누워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툭하면 전화를 걸어 “지금 뭐 해?”로 시작된 수다를 떨기도 하고, 전화를 끊고 강변을 함께 걸으며 수다를 이어가기도 했다. 


 다음 해 겨울 우린 불과 15일 차이로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지금, 그 친구 아들과 우리 집 둘째는 둘도 없는 베스트 프랜드로 자라고 있다. 아이들끼리만 친한 사이, 엄마들끼리만 친한 사이도 많은데, 엄마들의 우정에서 시작된 아이들의 우정도 못지않게 진하고 소중해서 늘 서로를 찾고 기다린다. 

15일 차이로 태어난 둘





 둘째가 태어나고 백일 즈음 되었을 때 남편은 이집트로 장기 해외 출장을 떠났다. 아는 친구분이 남편과 짐을 차에 싣고 떠난 후, 알 수 없는 상실감과 홀로 남겨 치러야 할 독박육아의 두려움 때문에 주체할 수없이 눈물이 흘렀다. 요즘 같아선 남편이 해외 출장을 간다고 하면, 기쁘고 들뜬 표정을 들키지 않게 마음을 다스리려 애쓰지만, 당시에는 오롯이 나의 몫으로 남겨진, 아들 둘 육아의 늪에 혼자 던져진 기분이었다. 아무리 애써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날들이 계속되면서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눈물이 흘렀다. 끝없이 이어지는 어두운 동굴 어딘가에 잔인하게 홀로 남겨져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심정이었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약속을 잡기도 하고, 집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아이 이유식도 두배로 만들어 문 앞에 걸어두기도 하고, 뻥튀기 같은 간식은 많이 사서 나눠먹기도 했다. 함께 유모차를 끌고 공원을 걷기도 하고 가끔 술 한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 그 친구는, 나를 외로움과 슬픔의 늪에서 꺼내준 구원자였다.  

    



 얼마 전 나름의 성과로 기쁜 일이 있어 친구에게 전화했다. 내일 나랑 술 한잔할 수 있겠냐는 톡에 친구는 바로 알았다고 답했다. 잠시 후 걸려 온 전화.     


“너 근데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내가 지금까지 너랑 사귀면서 네가 먼저 술 먹자고 한 적이 없거든. 진짜 심각한 문제는 아니지? 나쁜 일은 아니지?”     


 안 좋은 일이 아니라 오히려 기쁜 일이라며 말하고 끊었다. 그렇게 여러 번 술잔을 기울였는데, 내가 한 번도 먼저 술 먹자고 한 적이 없다는 친구의 말이 충격이었다. '늘 매번 이 친구가 다가와 주었구나' 하는 고마움에 눈이 뜨거워졌다.   

   

 야외에서 마시기로 해서, 나는 맥주랑 과자 두 봉지와 탄산수 몇 병을 챙겨서 친구를 만나러 갔다. 약속장소에 가보니 친구는 테이블보, 치킨, 풍선, 야광봉, 불빛 나오는 머리띠까지 준비해서 테이블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좋은 일인지 몰라서 내가 다 준비했어~! 뭔데 뭔데~~?”     




 또다시 그렇게 훅 다가와 주는 친구. 늘 나보다 먼저 일 보 전진하여 손 내미는 그 친구의 적극적인 다정함을 사랑한다. 힘들 때마다 “너 지금 어디야? 나랑 만나.”하고 말해주는 그 무대뽀 다정함을 기다린다. “너 생각나서 하나 더 샀어!” 하며 건네는 취향 비존중 다정함을 좋아한다. “이거 먹어봐. 내가 오늘 만들었어.”하며 문 앞에 걸어두는 근거 없는 자신감의 다정함을 애정한다. 표현력 부족한 내 모습을 늘 큰 목소리와 과도한 액션으로 반갑게 받아주는 친구의 과격한 다정함에 늘 감사한다. 쑥스러워서 한 번도 말한 적은 없지만, 좋은 일 슬픈 일이 생기면 가족보다 네가 먼저 떠오른다는 걸 알아주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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