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화. 콧구멍은 왜 벌렁거리나요?

유진 이야기 - 결국은 말하기 방식이 문제

by 히읗
알맹이는 남지 않고
그 비수만이 기억 속에 남는다.

"또 또 콧구멍이 벌렁벌렁하기 시작한다!"


콧구멍 벌렁거림 현상은

유진이 눈물을 흘리기 전 나타나는 전조다.

유진의 가족들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슬픈 장면이 나오면 항상 유진의 콧구멍부터 살폈다. 그리고 유진의 콧구멍과 흘리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눈물로 가득 찬 그녀의 두 눈을 번갈아보며 아주 웃겨 죽겠다는 듯 깔깔댔다.


유진의 이 요상한 버릇은 서른이 넘어서도 계속되었는데,

사회생활에서도 갈등 상황이 발생하면

상사 앞이고 후배 앞이고 할 것 없이 눈치 없는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유진의 인생에는 무언가 억울하거나 혹은 자신의 의도가 잘 전달되지 않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가장 먼저 목소리가 떨렸고, 거기서 멈추어야 모양새가 좋다는 걸 알지만, 할 말은 기어코 하고야 마는 그녀의 성격으로 인해 그다음으로 콧구멍 벌렁거림 단계로 넘어갔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경우 눈물 바람으로까지 이어지는 민망한 장면이 펼쳐지곤 했다.


"알겠으니까 일단, 감정 정리되면 얘기해요. 한 대리 은근 감정적인 사람이네."


유진이 3년 차 대리였을 때 일처리를 느리게 하는 다른 팀원의 일까지 모두 자신에게 떠넘겨지자 견디다 못해 팀장에게 부당함을 호소했는데, 그때 하필 또 콧구멍이 벌렁거렸던 것이다. 그 후 유진은 말싸움에는 소질이 없는 감정적인 사람으로 소문이 났고, '약해 빠졌다.'라는 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었다. 이렇게 말싸움을 못하는 유진의 이상형은 대화가 잘 통하는 남자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주야장청 이야기해 왔었다.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던 윤정우와 연애를 시작한 후, 유진이 처음으로 그와 말싸움을 하게 된 날

유진은 깨달았다. 말싸움도 대화의 부분집합이라는 것을.


본래 범인들의 말싸움이란, 으레 그렇듯 방어적을 넘어 공격적인 말투와 표정으로 인해 서로의 가슴에 비수를 꽂게 되는 법.

알맹이는 남지 않고 그 비수만이 기억 속에 남아 그것이 그때의 기분을 좌지우지하게 되는데, 유진과 정우도 이 말싸움의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논쟁이 벌어지면 '말투나 표정'이 결국 유진의 콧구멍을 벌렁거리게 만들었고, 감정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쏘아붙인 말들은 다시 정우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정치적 사건이건 젠더 이슈이건 각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표현하기 마련. 이런 예민한 주제를 다루는 그들의 대화는 늘 이렇게 흘러갔다.


"유진아 넌 그 사태 어떻게 생각해?"


"음, 난 잘 모르겠어. 지금은 그냥 어떤 판단도 하고 싶지 않아."


"왜? 난 잘 이해가 안 되네... 판단을 하지 않는 건 쉽고 편하지. 그치만 그렇게 소극적인 태도도 난 나쁘다고 생각하는데."


"뭐? 나쁘다고?... 왜 남의 생각과 표현 방식에 대해 그런 식으로 얘기해?"


"그런 너는 왜 남의 생각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데?"


"오빠처럼 그렇게 자기주장 떠드는 게 더 쉬워. 난 그걸 안 하고 싶어 하는 거고."


"뭐? 떠드는 게 쉬워?"


이런 식이었다.


조금 더 차분하게 서로의 생각을 존중해 주는 대화법을 구현하는 이성적인 인간들이었다면 말싸움이 아닌 토론으로 승화될 수도 있었겠지만, 현실에서의 대화는 토론보다는 말싸움의 형태를 띠는 것이 보통이었다.


사실 유진과 정우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 보면, 특정 주제에 대한 생각의 방향은 결국 비슷했다.

그런데

유진의 가슴속엔

"너의 생각이 잘못됐고, 나빠."가 남았고,

정우의 가슴속엔

"그렇게 떠드는 건 쉽지."가 남았다.


삼십 대 중반에 하는 연애는

피곤에 절여진 몸뚱이와 항상 경쟁한다. 그래서 자기와 생각이 다른 타인에게 굳이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거나, 그를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정 아니다 싶으면 마음속으로 정리하는 것이 피곤을 보태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피곤한 몸뚱이가 속삭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문제가 너무 많고, 개인마다 우선순위로 느끼는 문제도 다르며, 그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도 제각각 달라.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생각에 대해 판단하는 말은 나는 좀 거북하다고."


유진의 콧구멍은 또다시 벌렁거렸다.


어째서, 유진은 피곤한 몸뚱이의 속삭임을 거부하고 정우에게 자기 생각을 이해시키려고 애쓰고 있는가?



#유진과 정우의 통화 기록

"유진아, 잘 들어갔어?"

"방금 도착! 아 맞다! 내 이상형이 대화가 잘 통하는 남자라는 거. 오빠도 알지?"

"알지, 아까 싸운 거 신경 쓰여서?"

"응, 근데, 내가 좀 이기적이었던 것 같아. 어쩌면 나는 내 말에 무조건 공감해 주는 걸 원했었나 봐.

생각해 보니까 대화가 잘 통한다는 건, 나뿐만 아니라 상대방도 편하게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건데."

"음, 편하게 서로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아, 너무 어렵네, 주입식 교육의 피해자인가?"

"그런가, 난 일단, 말투나 표정에 예민한 사람이라서 내 생각이 존중받고 있구나 하고 느껴야 편하게 말할 수 있거든. 어... 무서운 표정이나 공격적인 말투가 내 콧구멍을 자극할 때가 있어. 무슨 말인지 알지?"

"아하하하 한유진, 무서웠구나!"

"그 정돈 아니었거든! 어쨌든, 우리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건 인정 주자. 그리고 서로를 이해해주는 말하기 '방식'이 진-짜 중요한 것 같아."

"그래, 어디 학원이라도 끊자!"

"장난 아니거든! 그리고 이런 말 꺼낸 김에... 내가 아까 감정적으로 말한 거 미안."


#오늘의 출제 포인트 feat. 유진

(안녕! 나 한유진! 처음이니까 간단하게 소개하고 시작할게! 이 코너는 국어 문제집을 만들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을 나와 내 친구들이 겪은 세상살이의 문제들과 관련지어 써 놓은 공간이야. 그럼 잘 부탁해!)


자기표현과 사회적 상호작용을 위한 화법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말로 또 글로 서로 소통하면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 그러니 그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 의사소통이 얼마나 중요하겠어? 그런데 의사소통 방식과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오해하고 결국은 갈등을 겪기도 하잖아. 그래서 우리는 화법을 배워. 아니 배웠어야 했지...

난 출판사에서 수능 국어 문제집을 주로 만드는데, 솔직히 그중 화법과 작문 파트는 모국어 화자라면 어느 정도는 '감'으로 풀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학생들이 큰 비중을 두고 공부하는 것 같진 않아. 나도 중고등학교 때 화법 수업을 제대로(?) 받은 기억이 없거든. 요즘은 다르려나?


수능 국어 화법 파트에서는 토의, 토론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오는데, 아무래도 자기주장을 표현하는 것에 서툰,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들을 반면교사 삼아 화법에서 이런 것들이 강조된 게 아닐까 생각해.

그런데 이제는 자기주장을 제대로 잘 펼치는 걸 뛰어넘어 진정성 있는 의사소통이 중요하다고 가르쳐야 할 때인 것 같아. 예를 들면 공감적 대화 같은 것들 말이야.

그리고 웬만하면 타인의 언어적 메시지에 대해 비난하는 투의 판단이나 충고는 자제하자!

부장님들이 '야! 나 때는 말야~'로 시작하지 않고, '한대리 때도 그랬구나~' 하는 날이 오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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