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여름의 시작이다.
계절의 시작과 끝을 날짜로 정확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5월 31일에서 6월로 넘어가는 순간
더 이상 봄이라 하기는 어렵다.
봄이 새로운 생명이 돋아나는 시작이라면
여름은 생명이 자라나는 성장기다.
사람의 일생을 계절에 비유해보자면
봄은 십대 청소년
여름은 이삼십대 청년이라 할 수 있다.
백세 시대에 들어서서는
사십대까지도 청년에 넣기도 하지만
신체 기능이 이미 완연한 하강기에 들어서는 사십대를
청년으로 보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성장이라 하면 긍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지만
성장에 반드시 좋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성장은 달리 말하면 변화가 많다는 의미다.
변화에는 좋은 쪽으로의 변화도 있지만
나쁜 쪽으로의 변화도 있다.
그리고 가을이 되어 성장이 멈추었을 때
나쁜 쪽으로 성장한 것을
좋은 쪽으로 돌리기는 매우 매우 어렵다.
식물도 동물도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봄에 좋은 토양에서 싹을 잘 틔워야 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한창 성장할 시기인 여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사람의 일생을 크게 좌우한다.
바로 여기에 청춘의 희망과 고민이 있다.
청춘은 고민이 많은 시기다.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그 가운데 스스로 길을 찾아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고민과 고통이 없을 수 없다.
어느 때는 차라리, 너는 이렇게 살아라, 하고
누군가 길을 정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만난다 해도
선뜻 따라 가기 망설여지는 이유는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민하고 흔들린다.
대신 그 고민과 흔들림 후에는 성장이 있다.
그래서 성장통이라 한다.
고민도 없고 흔들림도 없다면
성장도 없다.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아들 아이는
요즘 고민이 많아 보인다.
연습, 운동, 레슨 등
퇴근 후 활동은 변함 없이 열심히 하고 있지만
자신이 살아갈 사회에 대해 알아갈수록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고민이 깊어지는 듯하다.
내가 보기에 그 고민의 핵심은
이 사회에서 어느 정도까지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인 것 같다.
아이는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
그리고 이어서 카네만의 <생각에 관한 생각>(Thinking Fast and Slow)을 읽고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부자유한 존재인가를 깊이 자각하게 되면서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듯하다.
아이가 대화 중 그런 고민을 비칠 때마다
나는 확실한 답을 줄 수도 없지만
내가 생각하는 답이 있다 하더라도
직접 말하기보다 생각할 거리를 주는 데에서 그치려고 한다.
그리고 그런 흔들림을 겪고 있는
아이의 청춘이 슬쩍 부럽기도 하다.
흔들림이 없는 청춘은
아무리 젊어도 청춘이라 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흔들린다 하여 또한 다 청춘은 아니다.
인생의 가을에 들어서까지 흔들린다면
한창 성장하고 뿌리를 내려야 할 청춘기를
허투루 보낸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때로는 흔들리고 싶어도
그럴 마음이, 그럴 용기가 나지 않기도 한다.
이제는 청춘이 지났다는 표시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청춘에는 설레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안한 흔들림도 있듯이
인생의 가을에는 쓸쓸한 잿빛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장의 결과인 과실도 있다.
비록 남의 눈에는 볼품없을 지라도
나의 고민과 고통의 결과 맺을 수 있었던 과실이다.
그리고 성장의 여름이 지났다 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다.
보잘 것 없는 과실이라도 잘 빚어 오크통에서 숙성시키면
괜찮은 와인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있든지
내가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고 잘 살려
성장의 자양분으로,
또는 와인의 재료로 삼는 태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