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해경이 누나의 첫 모습은 마을 공터에서 아이들과 놀아주는 모습이다. 그 때 나는 일고여덟 살 쯤 되었을까. 누나는 아마 중학생 쯤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교복을 입은 모습은 그리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중학교는 다니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누나는 홀어머니와 몇 살 위 오라비와 같이 살았는데 어머니는 행상을 다녔고 오라비는 공장에 다녔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십대 초중반의 해경이 누나가 집안 살림을 하느라 학교에 다니지 못한 것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중학교가 아직 의무교육이 아니었던 그 때, 동네에는 그런 집이 간혹 있었다.
낮에 집에 혼자 있어서인지 몰라도, 누나는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잘 놀아주었다. 마당에서 고무줄놀이며 사방치기며 갖가지 놀이를 하며 놀아주기도 했고 날이 추워지면 방안으로 불러들여 놀기도 했다. 방안에까지 불러들이는 아이들은 대개 여자 아이들이었으나, 이유는 모르지만 나도 거기 낀 적이 많았다.
겨울날 이불 아래 발을 넣고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둘러 앉아 있노라면 누나는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했다. 장화홍련전을 처음 들은 것도 해경이 누나를 통해서였다. 누나는 이야기 솜씨가 좋았다. 아이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누나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누나가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실감나게 재현할 때면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웃기도 했다. 무서운 장면이 나오면 마음이 약한 아이는 울기도 했다.
그러니 동네 아이들이 심심하면 해경이 누나 집에 찾아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게 찾아오는 아이들을 보면 누나는 아주 바쁘지 않은 이상 잠깐이라도 같이 놀아주었다. 때로는 그렇게 모인 아이들끼리 마당에서 망까기 등을 하며 놀기도 했다. 누나네 집은 동네 꼬마들의 아지트였고 누나는 그 구심점이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면 누나는 꽤 예쁜 편에 속했다. 동그란 얼굴에 피부가 희었고 눈이 컸다. 그 오라비는 얼굴이 길쭉한 편이었는데 누나는 생김새가 꽤 달랐다. 하지만 당시 동네 꼬마들에게 누나의 외모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자기들과 잘 놀아주는 누나이자 언니라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누나네 집에 가는 것이 쑥스러워졌다. 이제 더 이상 꼬마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막 피어나는 처녀가 된 누나를 보면 웬지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 누나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를 마음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나만은 아니었는지 누나가 동네 아이들과 노는 모습도 점점 드물어졌다. 누나네 안방에는 더 이상 아이들이 모이지 않았다.
그 때 쯤 누나는 아마 고등공민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듯하다. 가끔 흰 블라우스에 검정치마로 된 교복을 입은 모습이 눈에 띄었다. 고등공민학교는 중학교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학력인정 기관이었다. 아마 학비가 상당히 저렴했을 것이다.
그 무렵 우리집은 옆 동네로 이사를 했고 누나와 마주칠 일은 더욱 드물어졌다. 대신 누나 어머니와 친분이 있던 어머니로부터 간간이 누나 소식이 들려왔다. 누나는 고등공민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다가 부잣집에 시집을 갔다. 부잣집이라고 했으나 어머니의 과장법을 고려해볼 때 과연 얼마 만큼 부자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오라비는 군대에 가서 병을 얻었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그로 인해 한 직장에 오래 다니지 못하고 이 직장 저 직장을 떠돌며 고생하는 듯했다. 장가는 물론 가지 못했다. 성격이 모질지 못했던 그는 가끔 만나 안부를 물으면 파리한 얼굴로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해경이 누나는 노쇠해가는 홀어머니와 병든 오라비가 사는 친정이 안타까워 가끔 다니러 왔다가 얼마씩 돈을 내어 놓고 갔다고 한다. 친정에 다니러 올 때면 꽤 멋지게 차려 입고 온 것으로 보아 부잣집에 시집갔다는 말이 사실인 듯도 했다. 그래도 아마 시댁 눈치가 꽤 보였을 것이었다.
몇 년 뒤 해경이 누나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동네 아이들과 잘 놀아주던 착하고 예쁜 누나. 의학이 발달한 지금 같으면야 살 길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암이면, 특히 부인과 암이면 살기 힘들었다.
누나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뒤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홀로 남아 있는 누나의 어머니를 위로하러 찾아갔다. 볕도 잘 들지 않는 어둑어둑한 반지하 방에 홀로 앉아 있는 그 어머니의 손을 잡고 어머니는 한참 울었다. 나도 옆에서 눈시울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과 잘 놀아주던 착하고 예쁜 해경이 누나. 지금은 천국에서 아이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지도 모른다.